과거 작가들은 어려운 고유어를 작품에 사용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도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 고유어를 욕심껏 찾아 써야 하며, 언론에서도 우리말을 애써 사용해야 한다. 사투리의 보존과 표준어 편입도 장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 고유어는 설 땅을 잃고 만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고유어=우리 근대 문학작품은 고유어의 보고다. 특히 근대사회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횡보 염상섭(1897∼1963)은 기대되는 작가들과 시인들만이라도 우리 고유어가 문학어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랐고, 스스로 실천했다. 횡보의 소설에 나오는 두루춘풍(누구에게나 좋게 대하는 사람· ‘효풍’ 중), 냅떠 보이다(냅뜨다·앞에 나서다·〃), 생량머리(초가을로 접어들어 서늘해질 무렵·‘취우’ 중) 등 단어는 곧장 써먹고 싶은 말이다.
홍명희(1888∼1968)의 ‘임꺽정’에는 밥 종류만도 기승밥(모를 내거나 김을 맬 때 논둑에서 먹는 밥), 조팝(좁쌀밥), 첫국밥(해산 후 산모가 처음 먹는 밥), 중둥밥(식은 밥에 물 붓고 무르게 끓인 밥), 턱찌끼(먹다 남은 음식), 대궁(먹다 남은 밥) 등 10개나 등장한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는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해설피가 무슨 말일까. 최근 김재홍 교수가 펴낸 ‘시어사전’에 ‘해가 질 무렵’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충청도 지방에 이와 비슷한 말로 ‘해설핏한데 어디 가느냐’라는 말이 남아 있다.
1997년 34세로 요절한 김소진의 데뷔작 ‘쥐잡기’에는 능쩡한(느른하고 굼뜬), 노루잠(잠이 깊이 들지 못하고 자주 깨는 잠), 수꿀한(무서워서 몸이 으쓱한) 우리 어휘가 풍부하게 나온다. 최명희(1947∼1998)의 ‘혼불’(전10권)은 아름다운 모국어의 ‘탁본’으로 불린다. 사운거리다(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소리내다), 아리잠직(얌전하며 귀여운 모양새) 등 무수한 고유어가 쏟아져 나와 별도 사전이 없으면 볼 수 없을 정도다.
◆사투리도 내일의 표준어=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골뱅이’는 표준어가 아니었다. ‘달팽이’ ‘고둥’ ‘우렁이’ 등의 사투리로 다뤄졌다. 지금은 ‘표준어대사전’에 등재된 떳떳한 표준어다. ‘나래’라는 표현도 사전마다 ‘날개’나 ‘지느러미’의 강원지방 방언으로 적고 있다. 방언으로 구분되다 보니 신문에서도 ‘희망의 나래를 펴다’로 적지 못하고, ‘희망의 날개를 펴다’로 적고 있어 영 말 맛은 떨어진다.
‘형한테 개기지 마’의 개기다(순종하지 않고 박박 대들다)나 ‘시방 몇 시여’의 시방(지금), ‘귀신인 줄 알고 식겁했다’의 식겁(뜻밖에 놀라 겁을 먹다) 등도 모두 사투리로 분류되고 있지만, 한땐 표준어로 사용되던 말도 있다.
◆비속어·비유어·우리 속담 활용=비속어·비유어도 사실주의 문학의 한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다리골 빠지다’ ‘대가리가 터지다’ 등이 그것이다. 속담에는 사자성어보다는 더 빗대기 좋은 표현이 많다.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빈다(바쁠 때는 모양이 비슷하기만 해도 사용된다는 뜻), 개 꼬리는 먹이를 탐내서 흔든다(누구에게나 반가운 척하는 사람의 이면에는 대부분 야심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 등 우리 속담을 잘 활용하면 우리 말글살이가 한층 풍요로워질 것이다.
◆과제=이미 개념어나 한자어로 굳어진 것은 우리말로 고치기가 어렵다. 그러나 꾸밈 말이나 서술어는 얼마든지 고유어로 바꿔 쓸 수 있다. 또 사투리는 고유어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 언중에 널리 쓰이는 것들은 발굴하여 표준어 영역에 적극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투봉법’이라는 강력한 국어보존법을 시행하고 있는 프랑스에서 도 지방어 보호정책에 매우 적극적이다. 앞으로 관계 당국에서 살려 써야 할 고유어를 뜻풀이, 용례 등을 정해서 주간이나 월 단위로 언중에 유포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다양한 고유어 용례를 제공하는 서적 등의 발간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정성수기자/hulk@segye.com
<기고> 이상규 경북대 교수-시인 방언은 민중들의 언어이다. 민중 언어는 삶 속에 살아 있는 언어라는 점에서 민중성과 지방성, 현장성을 지닌다. 특히 작가나 시인의 문학작품은 언어의 생태계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방언 어휘를 잘못 해석해 본래의 시가 지닌 맛깔과 전혀 다르게 현대어로 뒤바뀐 오류들이 많다. 예를 들면 이상화의 ‘가장 비통한 기욕’이라는 시에 나타나는‘햇채’는 대구방언에서 ‘더러운 물구덩이’ 또는 ‘시궁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을 ‘海菜물’ 곧 ‘해조류로 만든 국물’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경우이다. |
한편 시어에 방언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예도 있다. 박목월의 ‘만술 아비의 축문’ “아베요 아베요/ 내 눈이 티눈인걸/ 아베도 알지러요”에서 경상도 속담인 “내 눈이 티눈이다(까막눈, 곧 글자를 읽지 못하는 무식함)”로부터 서술어 ‘알지러요’, ‘배고플라요’, ‘가이소’, ‘엄첩다’ 등 풍부한 방언을 활용해 머슴살이하는 만술 아비의 한을 고즈넉이 표현해 내고 있다. 특히 ‘제법이다, 기대 이상이다’로 풀이할 수 있는 ‘엄첩다’라는 시어를 표준어 ‘제법이다’로 바꾸면 분위기는 영 딴판이다 소설가 최명희는 한국어와 토착 방언이 갖는 억양, 리듬감, 음의 고저·장단 등을 이해하고 문학 작품에서 잘 활용하고 있다. ‘술렁이다‘, ‘사운거리다’, ‘사르락 사르락’ 등의 의성·의태어인 동사와 부사를 사용한다거나 우리 전통의 색채어를 통해 시각적·감각적 효과를 의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어사전에 없는 어휘인 ‘꽃심’, ‘꽃빛’, ‘꽃각시’, ‘꽃밥 ’을 작가는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또한 고어형이 그대로 잔존해 있는 방언 어휘를 활용하기도 한다. 박목월 시에 ‘끄실리고’(당인리 근처)는 ‘그을리다’라는 뜻인데, 이는 경북방언의 음운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청마 유치환의 ‘항가새꽃’이라는 작품에서‘항가새꽃’은 ‘항것 귀’의 ‘항것’으로 오늘날 ‘황가새’라는 꽃 이름이 경남지역에 남아 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