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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타락한 여고생의 세상을 향한 절규

입력 : 2003-01-28 11:10:00 수정 : 2003-01-28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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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태 개인전 ''1987년 부터...'' 교복 차림의 여고생이 있다. 상의 윗부분의 단추들은 풀어져 있고 팽팽한 몸을 겨우 가리는 정도에 불과하다. 열린 단추 틈으로 검정색 브래지어가 보인다. 빨갛게 칠한 입술에 담배 한가치를 꼬나 물었고, 한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다. 머리칼은 노란색으로 물들였고 그나마 제대로 빗지도 않아 어수선하다. 치마도 몸을 가리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아서 팽팽하다. 여고생 뒤편으로는 이제 막 연록의 잎사귀를 틔우기 시작한 나무가 보인다. 이 작품의 제목은 '딸기 공주'로 명명됐다. '안녕하쇼?'라는 제목의 또다른 그림도 도발적이다. 마찬가지로 '날라리' 여고생이 주인공인데, 이 그림 속 어린 여학생의 눈빛은 매섭다. 세상에 대한 반항과 절망이 뒤섞여 있다. 최경태(46)씨가 여고생을 모델로 그려 온 최근작 '빨간 앵두' 시리즈들이다.
최씨는 지난해 여고생 포르노그라피 전으로 외설시비에 휘말려 법정에 섰다. 그는 꼼짝없이 벌금형을 받았고, 이 전시에 출품했던 30여점의 작품은 압류당해 소각돼 버렸다. 미성년자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노출됐을 뿐만 아니라 성행위 장면까지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계에서도 웬만하면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예술행위를 옹호하려 했을 법 하지만 작가 혼자서만 동부서주했을 뿐 아무 곳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최씨는 "인터넷에 들어가 '여고생'을 치면 수백개의 포르노사이트들이 뜨는 세상에서 한정된 전시공간에 이 자본주의 사회의 극단적 절망을 표현한 것이 누구에게 위해를 끼치는 행위인가"라고 반문했다. 손바닥으로 두 눈만 가리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는 항변이다. 최씨의 이런 파격적인 '일탈'은 일종의 '반항적 절망'이었다. 그가 청계천에서 음화를 만들어 파는 잡상인이 아닌 바에야, 더구나 민중미술 작가로 한국사회의 현실을 진지하게 묘파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수난'은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아도 될 듯하다.
그는 오는 2월14일부터 3월13일까지 서울 쌈지스페이스에서 그 동안에 그려온 자신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1987년부터 빨간앵두까지'를 연다. 이 전시에는 87년 6월항쟁 당시부터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최경태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을 내놓는다. 힘찬 칼질로 세월의 이끼가 묻어나는 노동자의 얼굴을 클로즈업 한 목판화 '소주 한 잔에 웃을 수 있는'을 비롯해 한국사회 음지와 양지의 현란한 모습을 11장의 연작 그림을 붙여 파노라마처럼 펼치는 대작 '한국 판타지', 뭉크의 그림이 연상되는 듯한 절망의 강렬한 색채로 그린 '전사', 시골 다방에 홀로 앉아 소주병을 움켜쥐고 지친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늙은 레지의 노래' 등이 만만치 않은 작가의 이력을 웅변한다. 이처럼 진지하게 작품에 매진해오던 그가 4년여의 공백기간 끝에 내놓은 작품이 '여고생 포르노그라피'였다. 민중미술작가가 세상이 변하면서 '타락'했던 것일까. 그러나 최씨는 변함없는 일관된 맥락이었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민중미술을 한다는 이들이 세상의 지형이 조금 바뀌자 모두 제도권으로 들어가 '잘 먹고 잘 사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내 그림 속 날라리 여고생들의 모습은 기성세대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겉보기에 그들 스스로 그런 모습을 연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썩어빠진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유도한 것이다. 가장 윤리적으로 타락한 극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지난해의 연장선상에 더 과격하게 치고 나갈 것인지 후퇴할 것인지 고민했지만, 통념적인 장벽에 막혀 일보 후퇴했다고 말한다. 그 대안이 '빨간 앵두' 시리즈인 것이다. 그가 사는 충청도 음성군 시골 소읍의 '출구가 막힌' 대안 없는 여고생들의 모습을 통해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이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1년에 두세 번은 막노동판에서 뛴다는 그는 "그림이야말로 아직은 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지 않아도 마음껏 발언할 수 있는 소중한 도구"라고 말한다. /조용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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