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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신 서희(세계사 인물기행:22)

입력 : 1998-02-09 00:00:00 수정 : 1998-02-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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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바꾼 “달변”/높은 외교식견으로 국제정세 꿰뚫어/억지 부리던 요소손녕 담판으로 설득/되레 영토확장 실리챙기며 국난타개/사건 초래한 지나친 사대주의 “경종”
고려 성종12년(993)에 거란족 왕조 요가 고려에 쳐들어왔다. 자기들이 이미 고구려에 옛 땅을 차지 했는데,고려가 그 땅을 침탈했으므로,징벌한다는 것이었다. 소손녕이 이 끈 요군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군을 깨뜨렸다.
당시 서경에서 군대를 독려하던 성종은 신하들과 난국을 헤칠 길에 대해 의논했다. 그 자리에 선 서경 이북의 땅을 요에게 넘겨주고 황주에서 절령­지금의 자비령­까 지를 국경으로 삼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성종은 그 주장을 따르기로 하 고 서경의 창고를 열어 쌀을 백성들이 가져가도록 했다. 그렇게 했어도 쌀은 남았는데,성종은 적군의 양식이 되는 것을 꺼려 그 쌀을 대동강 에 버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중군사로 요군을 막던 서희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에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군사의 강약에만 달린 것이 아 니고 좋은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데도 있습니다. 사정이 그러한데,어찌 갑자기 쌀을 버리게 하십니까? 게다가,먹을 것은 백성의 목숨이니,차 라리 적군에게 이용되었으면 되었지,헛되이 강 속에 버리는 것은 하늘의 뜻에 맞지 아니합니다』
성종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쌀을 강에 버리 라는 명령을 거두었다. 서희는 다시 아뢰었다.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이 차지했는데,광종께 서 빼앗아 가주와 송성 등의 성들을 쌓으셨습니다. 이번에 거란군이 온 것은 그 의도가 그 두 성을 빼앗으려는 것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고 구려의 옛 땅을 빼앗는다고 큰 소리 치지만,실은 우리에게 공갈하는 것 입니다. 지금 저들의 군세가 강성함을 보고 선뜻 서경 이북의 땅을 넘 겨주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의 땅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저들이 땅 욕심을 내서 계속 요구하면,다 들어줄 수 있겠습니 까? 사정이 그러한데도 지금 땅을 떼어준다면,참으로 만세의 수치가 될 것입니다. 임금께선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저희들이 한번 싸우게 하소서 . 그 뒤에 다시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성종이 그 말을 따랐다. 거란군은 다시 고려군을 공격했지만,대도수와 유방이 이끈 고려 군에게 패했다. 그래서 소손녕은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서 항복하기를 재촉했다. 고려에선 서희를 거란 진영으로 보냈다.
소손녕 이 말했다. 『당신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고구려 땅은 우리 것 이오. 그런데 당신 나라가 그 땅을 침식했소. 그리고 우리와 이웃하면 서도,바다 건너 송을 섬겨왔소. 그래서 우리가 와서 치는 것이오. 이 제 땅을 떼어 바치고 조빙한다면,무사할 것이오』
서희가 대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고려라 했고 도읍을 평양에 두었습니다. 만약 국경을 따지기로 한다면,상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 경계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압록강 안 팎은 역시 우리 경계 안인데,지금 여진이 그 사이를 훔쳐서 자리잡았습 니다. 그들은 더럽고 교활하여,길을 통하기가 바다를 건너기보다 어렵습 니다. 조빙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진을 내쫓 고 옛 땅을 다시 차지해서 성채와 보루를 쌓고 도로를 열면,감히 조빙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서희의 말엔 조리가 있어서,소손녕은 더 윽박지르지 못했다. 마침내 소손녕은 자기 황제에게 고려와 화친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서 이레를 머무르다가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오니,성종은 강 나루까지 나와 맞았다. 그리고 요 황제에게 감사하는 사신을 보내도록 했다.
그러자 서희가 아뢰었 다.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평정하고 옛 땅을 회복한 뒤에 조빙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을 회복했으니,강 밖 의 땅도 얻는 것을 기다려 조빙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그 말을 물리쳤다. 『너무 오래 조빙하지 않으면,후환이 두렵소 』 그리고 사신을 요에 보냈다.
서희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외교가였다. 그는 크게 불리한 처지에서 벌인 담판에서 오히려 영토를 넓힐 기회를 찾아냈다. 그와 비길 만한 이로는 신라의 삼국 통일 과정 에서 뛰어난 외교 활동을 벌인 김춘추를 꼽을 수 있을 따름이다.
동 양사의 주요 무대인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가 국제 무역이나 해상 활동의 전통이 미미했으므로,우리 나라는 옛날부터 이웃 나라들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국수주의 성향이 무척 강했고 다 른 나라들에 대한 태도와 정책이 비합리적인 경우들이 많았다. 그런 전 통은,안타깝게도,지금까지 이어져,우리의 외국에 대한 태도와 정책엔 비 례와 과공이 교차한다.
요가 고려에 침입한 사정에서도 이 점이 잘 드러난다. 926년 발해를 병탄하자,요는 접경하게 된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태조는 요가 화친할 나라가 못 된다고 여겼다. 발해와 맹약을 맺었다가 갑자기 쳐서 멸망시킨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신 30명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그들이 선물로 가져온 낙타 50마리는 모두 굶겨 죽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세운 정치가가 이런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나라들 사이 의 관계를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비긴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사절을 귀향보낸 것은 동서고금을 따질 것 없이 존중된 국제관행을 어긴 것이고 ,낙타들을 굶겨 죽인 것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다른 나라의 외 교적 움직임에 그렇게 대응한 왕조에서 높은 외교적 식견을 가진 지도자 들이 나올 리 없다. 그래서 요와의 충돌을 예견한 사람이 없었고,요가 고려를 치려고 준비한다는 여진의 제보가 있었어도,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큰 군대가 쳐들어오자,이내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려 했고 서둘러 칭신했다. 고려 초기에 나온 이런 비례와 과공의 교차는 우리 역사에 서 너무 자주 되풀이되었다.
서희가 어려운 처지에서 큰 외교적 성과 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국제 정세를 잘 읽었기 때문이다. 97 9년 송이 중국을 통일한 뒤,요와 송은 줄곧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서희는 그래서 요가 고려의 정복에 큰 힘을 쏟기 어려우며 고려를 견제 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고 판단했다.
안타깝게도,서희를 이을 외교가는 나오지 않았고,고려는 요와의 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 서 두차례나 요의 침입을 받았다. 요가 송과 치열하게 싸우던 때라,고 려는 상당히 유리한 처지였는데도,그렇게 외교에서 실패한 것은 안타깝다 .
거란은 4세기부터 동몽고에서 활약한 유목민족이다. 10세기 초엽 에 야률아보기가 부족들을 통일하여 요를 세웠고,그 뒤로 몽고,만주와 화북을 지배하다가 12세기 초엽에 여진족의 금에게 멸망했다. 왕족 야 률대석은 요의 남은 세력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서요를 세웠다 . 80년 동안 이어진 서요의 활약이 중앙 아시아 사람들에게 깊은 인 상을 남겨,거란을 뜻하는 〈Kitai〉에서 나온 〈Cathay〉가 서 양에선 중국을 뜻하게 되었다.<글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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