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살인 年 17.5건… 10년새 3배 ↑
자녀 42% 부부 32% 범행… 가족 간 비극
老老돌봄 많은 탓 가해자 65% 70대 이상
하루 12만원 간병비… 장기간 감당 못해
돌봄시스템 미비… 방치된 가족 고통
사회문제로 인식 법체제 만든 日과 달리
韓 개념 부재… 범죄 집계도 걸음마 단계
“사적영역 치부 말고 국가적 정책 마련을”

올해 4월19일 오후 6시쯤 부산 지역에서 범행을 자백하는 112 신고가 접수됐다. 전화를 건 60대 남성은 수화기 너머에서 더듬는 말을 이어갔다. 술을 마신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즉각 출동한 경찰은 부산 사하구 감천동의 한 주택 내부에서 숨진 70대를 발견하고, 힘없이 벽에 기댄 채 주검을 멍하니 응시하던 남성을 체포했다. 동생은 경찰 조사에서 “치매가 있는 형 병간호에 나도 지쳤다”고 울먹였다. 형은 10년 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노인성 치매를 앓아왔고 간병은 감천동 고지대 노후주택에서 같이 살던 그의 몫이었다. 그는 범행 전날을 비롯해 ‘정신없는 형’이 사라져 마음을 졸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동생은 “나도 한계에 달했다”며 고개를 떨궜다.
간병이란 늪에 빠진 사람들이 금전적·정신적 부담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간병이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면서 관심과 지원을 받기 어렵다는 점이 비극을 키우고 있다. 우리나라가 초고령사회(전체 대비 노인 비중 20% 이상)에 진입하면서 ‘간병지옥’으로 몰리는 국민이 늘어나고, 이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늘어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에 전문가들은 간병의 현실을 조명하고, 관련 범죄에 대한 법적 테두리를 마련해 국가의 간병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밑바탕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간병살인 연간 17.5건… 가해자 42%는 자녀
30일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의 ‘간병살인의 실태와 특성 분석’ 결과에 따르면 2007∼2023년 17년간 형사법원에서 확정된 간병살인은 모두 228건이다. 이 중 자녀가 부모를 살해하는 친자 간병살해는 96건으로 전체의 42.1%를 차지했다. 이어 부부 간병살인이 72건(31.6%), 친장(장애 자녀) 간병살인이 44건(19.3%) 등의 순이었다.
고령화와 함께 간병살인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2013∼2023년 연평균 간병 살인은 17.5건으로, 2007∼2012년(연평균 6.0건) 대비 3배 가까이 급증했다. 보고서는 “코로나19 확산 초기였던 2020년에 30건으로 가장 많은 판결이 선고됐다”며 “연도별 간병살인 선고 건수가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고령화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일본에 비해 우리나라의 대응은 뒤늦은 상황이다. 일본은 간병살인을 사회 문제로 받아들이고 2006년 ‘고령자학대방지법’을 제정하는 등 법적·사회적 보장체제를 구축해 왔다. 2007년부터는 경찰청 범죄통계에 간병살인을 살인범죄의 동기로 신설해 통계를 공식 집계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경찰대 보고서가 정부 기관의 첫 국가 분석일 정도로 걸음마 단계에 그치고 있다. 별도의 법적 개념도 존재하지 않아 살인죄나 존속살해죄로 처벌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노(老老) 돌봄’은 이미 현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간병대상자 중 70.2%는 65세 이상 노인이며 간병인 연령은 50대 이상이 72.9%를 차지했다. 50대(32.5%)가 가장 많았고 40대(21.4%), 60대(20.9%), 80대(9.9%), 70대(9.6%), 30대(4.6%), 20대(1.2%) 순이었다. 주 간병인 성별은 여성(79.1%)이 남성(20.1%)에 비해 3.8배 많았다.
노노돌봄의 참담한 현실은 살인 등 간병범죄로 이어지기 쉽다. 연령대별 간병살인 가해자는 80대 26.9%, 70대 21.5%, 90대 16.1%로 3명 중 2명가량이 70대 이상이었다. 부부돌봄 도중 배우자를 살해했을 개연성이 크다. 주로 부모를 간병하는 연령대인 중년층 비율은 30.1%(40대 7.5%, 50대 14.0%, 60대 8.6%)였다.

◆노노·독박돌봄이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
초고령화와 1인 가족 증가 등 인구구조 변화로 노노돌봄, 독박 간병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시민단체 우리복지시민연합의 은재식 사무처장은 “고령화 사회에서 노노 간병 문제, 우리 사회의 돌봄 시스템 부재, 1인 가구 증가 등 복합적 흐름이 이어진 결과”라면서 “경제적 부담과 더불어 코로나19 확산 이후 가족 간 간병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만들어진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사건 발생 시간대를 보면 독박 간병과 밀접한 연관성이 나타난다. 간병살인은 오후 9∼12시 46건(20.6%)으로 가장 많이 발생했고, 오후 6∼9시가 29건(13.0%), 0시∼오전 3시 28건(12.6%), 오전 3∼6시 22건(9.9%)이었다. 주로 가족 간병인이 전적으로 간병을 전담해야 하는 야간과 새벽, 식사를 도와야 하는 시간대에 발생한 것이다.
강은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비혼이나 이혼·사별 노인의 증가와 자녀 수의 감소 추세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비공식 돌봄의 약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며 “공적 및 지역사회 민간 자원을 활용한 돌봄서비스의 충분성을 확보하는 등 다각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간병비 부담도 간병살인의 주된 요인으로 보인다. 채민석 한국은행 고용분석팀 과장 등이 지난해 발표한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월평균 간병비는 약 370만원으로 추산됐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일평균 간병비(12만2000원)를 월 기준으로 환산한 금액이다. 이는 65세 이상 가구 중위소득(224만원)을 훌쩍 넘는 규모로, 자녀 가구(40∼50대) 중위소득(588만원)의 60%를 넘어서는 수치다.
전문가들은 회색지대에 놓여 있는 간병살인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고 법적 테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간병범죄에 대한 공식 집계부터 작성하고 유형별 사례를 분석해야 관련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곽대경 동국대 교수(경찰행정학)는 “우리나라에서 간병에 대한 책임을 가족 등 개인에 맡겨둔 측면이 분명하기 때문에 (간병살인을) 개인의 탓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사회 안전망이 촘촘하지 못한 영향도 있기 때문에 정상참작의 여지 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민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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