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3500km, 비행기로 5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캄보디아는 연간 500만명이 찾는 관광국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에이즈 왕국’과 ‘아동성매매 천국’이라는 오명이 자리 잡고 있다. 캄보디아는 1980년대 내전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이 기본적인 보건교육을 받지 못한 데다 성매매까지 활성화돼 1990년대 들어 에이즈가 급속히 확산됐다. 1997년에는 15세 이상 인구의 3%가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됐을 정도다. 최근 감염율은 낮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15세 이상 인구의 0.8%가 HIV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9월부터 10월까지 두 달간 캄보디아에서 머물면서 목격한 에이즈와 아동 성매매 실태를 전한다.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지난 9월 중순 처음 찾은 ‘HOF’(House Of Family)는 여느 고아원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이곳은 슬로바키아 비정부기구(NGO)가 만든 곳으로, 7∼18세 아동·청소년 46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널찍한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한 그네와 농구 골대, 그리고 대가족이 한번에 앉을 수 있는 기다란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었다. 다른 곳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실내 곳곳에 수많은 약통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높이가 20cm 정도 되는 동그란 플라스틱 통 뚜껑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이에게도 스스럼 없이 다가왔다. 이름을 외우기 위해 사진과 이름이 적힌 A4 용지를 꺼내자 저마다 자신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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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맑은 HOF 아이들의 모습. 기사에서는 가명을 썼으나 아이들의 밝은 모습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얼굴 사진을 싣는다. 사진은 HOF 측으로부터 실어도 된다는 허락을 구했다. 프놈펜=김유나 기자 |
HOF는 HIV 감염 아동을 위한 고아원이다. 아이 부모는 대부분 에이즈로 숨졌고, 아이들에게도 HIV를 남겼다.
오전 시간 고아원은 조용한 편이다. 아이 대부분이 학교에 가고, 오후반인 아이들 또는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빠진 아이들 몇명 만이 이곳을 지킨다. 로니(14)는 소파에 앉아 체온을 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몸이 안 좋아 학교에 가지 않고 있는 로니는 익숙한 듯 스스로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넣고 시간과 체온을 확인한 뒤 공책에 적었다. 공책에는 열이 오르는 날 새벽부터 매 시간 기록한 체온이 빼곡하다. 이곳의 아이들은 아픈 것에 민감하다. 몸속 바이러스가 작은 병도 무섭게 바꿔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탁자 위에 무심히 놓아둔 체온 공책과 체온계, 약봉지는 이곳의 흔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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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니(14·가명)의 체온 기록 노트. 열이 나는 날이면 새벽부터 매 시간 확인해 꼼꼼히 기록한다. |
이곳의 많은 아이들은 부모의 죽음 등으로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4살 때 이곳에 온 사밧(12)은 날마다 악몽을 꾸고 침대에 오줌을 싸는 등 오랜 시간 적응하지 못했다. 6살 때 입소한 자티(15·여)는 처음엔 누군가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금세 울음을 터뜨렸고, 지금도 처음 만난 사람은 경계한다. 이런 아이들을 변화시킨 것은 사랑과 관심이다. HOF의 매니저 수재나(33·여)는 “우리 아이들은 낯선 사람에게 안심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며 “아이들에게 진짜 집,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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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위치한 HOF 실내에 있는 아이들의 약통들. 약통마다 아이 이름이 적혀있다. |
이런 이유로 HOF에서 가장 신경 쓰는 점도 아이들의 심리적 안정이다. 베로니카는 “‘너는 괜찮다. 약을 먹는 것뿐이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 병이 부끄러울 수 있지만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준다”며 “대부분의 아이들은 결국 이런 처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사회에도 HIV와 에이즈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 단순 접촉만으로도 감염이 될 수 있다는 게 가장 대표적인 오해다. HIV는 손을 잡거나 침이 튀는 것 등 일상의 접촉 만으로 전염되지 않는다. 그러나 감염된 아이들을 받지 않는 고아원이 많아 형제 중 혼자 감염된 아이는 형제들과 떨어져 지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몸 상태를 알게 된 뒤에도 학교 친구들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다.
졸업 후에도 차별은 이어진다. 이곳에서 자라 성인이 돼 대형 호텔에 취직했던 한 여성은 최근 HIV 감염 사실이 알려져 해고당했다. 현재 작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지만, 여전히 몸 상태를 숨기고 있다. 베로니카는 “정부는 HIV를 줄이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만 감염인들이 사회에 나가 부딪치는 고용차별 등의 문제는 소홀히 한다”고 토로했다.
아이들이 주로 의지하는 대상은 HOF 직원들이다. 11명의 직원은 아이들의 보호자이자 선생, 때로는 엄마아빠이기도 하다. 방과 후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거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주는 것도 이들 몫이다. 아이들은 종종 직원들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안기기도 한다.
한 아이에게 몸 상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아이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엔 무서웠어요.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싫었어요. 하지만 선생님들(HOF 직원들)이 날 사랑하라고 가르쳐줬어요. 이젠 괜찮아요.”
엄마 아빠가 밉지 않냐는 말에 잠시 답이 없던 아이는 “조금은”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가족이 있으니 괜찮아요.”
캄보디아를 떠나는 날 아침, “오늘이 마지막 날”이란 말에 아이들은 잠깐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각국에서 HOF로 자원봉사자들이 오지만, 보통 한두 달이 지나면 돌아간다. 아이들에게 누군가를 만나고 떠나보내는 것은 익숙한 삶이었다. 떠나기 전 마리아(16·여)에게 분홍색 립글로스를 쥐여 줬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나이여서 언젠가 립스틱을 빌려줬더니 좋아했던 게 생각나 고른 선물이었다. 마리아는 환하게 웃더니 곧장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앳된 얼굴에 립글로스를 바르니 귀엽게만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 마리아도 화장이 잘 어울리는 어른이 돼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부딪칠 편견과 받게 될 상처를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과 자신의 병을 받아들인 것처럼 결국엔 이겨내기를 바라며 대문을 나섰다. 아이들은 대문이 닫힐 때까지 활짝 웃으며 계속 손을 흔들었다.
프놈펜=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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