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라덴은 당시 다른 두 아내에게 각각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아프간에서 자신과 함께 남아 있길 제안했다. 물론 알-사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사다는 빈 라덴의 제안을 듣자마자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하겠다. 당신이 살아있는 한 떠나길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빈 라덴은 즉시 "어느 순간에 내가 죽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알-사다는 "난 이미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알-사다의 결정에 대해 그의 이혼한 모친의 사회적 지위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알-사다는 그의 부친에게 "아프간 생활은 힘들지만 빈 라덴과 있으면 편안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알-사다의 가족들은 "그가 1999년 말 빈 라덴과 결혼한 이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알-사다에 대해 "'용감한' 젊은 여성"이라며 "매우 보수적이지만 원리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알-사다는 고등학교를 중퇴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현실에서 배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길 원했다"고 덧붙였다.
알-사다의 사촌 왈리드 하셈 압델-파탈 알-사다는 "그는 언제나 친구들과 가족에게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고 상기했다.
1999년 알-사다의 형부가 그의 삼촌집에 한 가지 소식을 들고 방문했다. 빈 라덴이 신부를 찾고 있다는 것. 형부 모하메드 갈리브 알-바니는 빈 라덴과 친구 사이였다고 알-사다의 가족들은 전했다.
알-사다의 삼촌 하셈 알-사다는 "빈 라덴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독실하고 존경받을 만한 가문 출신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며 "사적으로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하셈은 "빈 라덴이 1998년 케냐와 탄자니아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폭탄테러를 자행한 인물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빈 라덴과의 혼인과 관련 알-사다에게 "너의 선택이고 너의 미래다"라고 전했으며 하셈의 아내는 "신의 뜻이다. 빈 라덴의 청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알-사다는 빈 라덴을 만난 적이 없었다. 예멘에서 결혼은 중매를 하거나 구혼자의 사진을 보고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몇 주 뒤 하셈은 알-사다의 후견인 자격으로 결혼계약서를 작성했고 알-사다의 형부는 빈 라덴을 대신해 서명했다. 빈 라덴은 예멘 전통에 따라 알-사다의 가족에게 5000달러(약 540만원)를 지불했다.
알-사다의 부친 아메드 압델-파타 알-사다는 "후에 딸과 빈 라덴 사이에 사피야라는 딸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가족들은 알-사다와 사피야를 보기 위해 아프간으로 향했다. 하지만 9·11테러가 발생하기 전이었어도 매우 힘든 여행이었다고 전했다.
압델-파타는 "딸의 환영 속에 아프간에 도착했다"며 "다음 날 빈 라덴이 알카에다 지도자들과 아프간 부족 관계자들과 함께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와 반겨줬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그는 "빈 라덴은 친절하고 고결한 사람"이라며 "여유있고 겸손하지만 상대방이 그를 진지하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빈 라덴은 알-사다와 함께 9·11테러 이후 잠적하기 전까지 아프간 칸다하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사다의 사촌은 "압델-파타가 9·11테러 소식을 접한 후 빈 라덴이 해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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