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시대 위로를 준 시인
스무 살 수녀원 입회 후 무명으로 글써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출간
1980년대 새로운 삶의 의지를 심어줘
팬데믹 시대에 ‘한 줄기 비’로
코로나 시대엔 사랑이 더욱 중요해져
‘비 내리는 날’서 수도자의 길 보여줘
“메마름 적시는, 죽어서도 비 되겠다”
시를 바다처럼 나누고 싶은…
어느덧 거울 앞에서 마주한 70대 노인
시로 살다가 그 자체가 시가 되고 싶어
앞으로 동화 쓰기에 한번 도전해 볼 것
모처럼 여유가 있던 어느 날, 시인인 이해인 수녀는 머리 수건을 바르게 쓰기 위해 거울 앞에 앉았다가 머리가 하얗게 꽃핀 한 수녀를 마주보았다. 해맑았던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노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바쁜 머리 수건 속에 감춰져 있던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제 사랑할 시간도, 기도할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구나. 막 우울해지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창밖에서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기쁘게 살아있다고.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오늘 하루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 그는 손으로 베일을 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마음은 아직/ 열일곱 살인데/ 얼굴엔 주름 가득한/ 70대의 한 수녀가 서 있네// 머리를 빗질하다 보니/ 평생 무거운 수건 속에/ 감추어져 살아온/ 검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서/ 떨어지며 하는 말/ 이젠 정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기도할 시간이 길지 않아요”(‘거울 앞에서’ 부문)
많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시인이자 수녀인 이해인 작가가 시와 편지글을 모은 책 ‘꽃잎 한 장처럼’(샘터)을 최근 펴냈다. 책에는 새로 쓴 시들과 최근 2년여 일간지 등에 실린 시 편지글, 기념시와 일기 등이 담겼다. 이 작가는 온기와 향기를 품은 글들로 힘든 이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보낸다.
그의 시는 1980년대 이후 남녀노소나 지식수준, 직업 등과 상관없이 수많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왔고, 교과서에도 적지 않은 시가 수록됐다. 그의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해설 ‘이해인의 시세계’에서 “고통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새로운 삶에의 의지를 심어주면서 엄청나게 많은 독자들을 끌어 모으게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이 작가의 시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그와 그의 시들은 왜 대중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며, 시 창작 비밀은 무엇일까. 이 작가를 지난달 25일 줌 인터뷰로 만났다.
이번 책에 실린 신작시에는 코로나 팬데믹의 시대상이 깊이 새겨져 있다. 먼저 시 ‘비 내리는 날’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더욱 힘든 코로나 시대의 수도자 마음가짐을 잘 보여준다.
“떨어지는 빗줄기/ 기도로 스며들고/ 빗방울은 통통 튀는/ 노래로 살아오니//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겠다/ 우는 사람부터/ 달래야겠다//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 어디서나/ 메마름을 적시는/ 비가 되어야겠다/ 아니 죽어서도/ 한줄기 비가 되어야겠다”(‘비 오는 날의 연가’ 부문)
―죽어서도 한 줄기 비가 되어야겠다는 부문이 참 인상적이데요.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고, 수도자로서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도 많으니까, 메마름을 적시는 비처럼, 정말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죠. 비는 목마름을 축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니까요. 마더 테레사도 하느님은 인간의 사랑을 목말라 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목말라 한다며 목마르다는 단어를 많이 썼고요.”
물론 수녀의 길을 걷고 있는 작가는 시 곳곳에서 수도자로서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위로,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시 ‘용서의 꽃’은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용서하지 못한 모습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성찰을 담고 있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대신해/ 오늘은 당신께/ 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토록 모진 말로/ 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 미워하는 동안// 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 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아/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젠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참 이기적이지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은 용기 없어/ 이렇게 꽃다발로 대신하는/ 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용서의 꽃’ 전문)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지 않을까요.
“동료들과 사소한 말 한 마디로 마음이 상할 때가 있지요. 관계가 껄끄러워 가지고, 화해는 해야 되겠는데, 계속 뭐라고 그럴까 어색하고. 그럴 때 꽃을 갖다 준다든가, 동료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방에다가 살짝 갖다 놓는다든지 하지요. 성철 스님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안으로는 가난을 배우고 밖으로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고, 어려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며,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고, 공부 가운데 가장 큰 공부는 남의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라고 했어요. 용맹까지는 흉내를 내볼 수 있겠는데, 마지막은 못 하겠더라고요. 역시 제일 어려운 것은 용서 같아요. 용서라는 것, 살아있는 동안 큰 숙제인 것 같습니다.”
조그만 아이의 머리통 속에서 어떻게 이런 게 나오겠어, 언니나 오빠가 대신 써줬지? 소녀 이해인이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전까지, 담임선생은 그의 글짓기 숙제를 도대체 믿어주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 우울했던 초등학교 시절 의지할 게 책밖에 없어서 언니 오빠와 함께 늘 책을 끼고 글을 쓰곤 했던 그였는데도. 그러니까,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열린 글짓기 대회에서 ‘학교 가는 길’이라는 글로 일등을 한 뒤에야, 담임선생은 그의 글들이 언니나 오빠가 쓴 게 아니라 스스로 썼다는 걸 믿어줬다.
그는 풍문여중에 들어간 뒤 문예반에 들어가서 글을 즐기면서 배웠고, 고등학교 시절엔 전국 고등학생 글짓기 대회에 참가해 1등을 했다. 특히 4·19혁명이 끝난 직후 경북 김천에서 열린 전국 고등학생 추모식 행사에선 학생 대표로 창작시를 읽기도 했다. 작고할 때까지 인연을 이어온 풍문여중 문예반의 임영무 선생과 성의여고의 홍성문 선생은 ‘영롱한 소녀’ ‘내일의 규수 시인’이라고 칭찬을 해주곤 했다.
이해인은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금융조합에 일하던 아버지와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3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명숙. 태어난 지 3일 만에 받은 세례명은 벨라뎃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됐고, 어머니가 홀로 자식을 키웠다.
스무 살이 되던 1964년, 그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 입회했다. 수도자 이름은 클라우디아.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1968년에 첫 서원을 했고, 1976년에 종신서원을 했다. 1992년 수녀회 총비서직을 맡았으며, 비서직을 그만둔 뒤 1997년 부산 수녀원에서 ‘해인글방’을 열었다.
이해인은 수녀원에 입회한 이후 ‘넓고 어진 바다 마음으로 살고 싶다’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1970년 천주교 잡지 ‘소년’에 글을 기고했고,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톨릭출판사)를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을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첫 시집을 내게 된 것인가요.
“1975년 당시 총장이던 임남훈 수녀님이 저의 시가 어느 수준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쓴 시 10편을 가톨릭출판사 사장인 김병도 신부님을 통해 몰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인 홍윤숙씨에게 보냈는데, 홍 시인이 그것을 읽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특별한 색깔이라며 시집을 내자고 했지요. 당시는 수도회 분위기가 대단히 보수적이라 어느 한 개인이 밖으로 드러내는 건 상상이 안 되는 시기였기에 걱정을 많이 했지요. 박두진 시인이 제목과 서문을 써주고 홍윤숙 시인이 앞장서면서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단자도 아닌 무명 시인인데도 화려하게 데뷔를 하게 됐지요. 처음 우리 식구들끼리만 돌려보려고 조금만 찍었는데, 신문에 기사가 실리면서 난리가 났어요. 수십 권의 책을 냈지만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저의 첫 사랑이라 정이 많이 갑니다.”
이후 시집으로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시간의 얼굴’(1989), ‘엄마와 분꽃’(1992) 등을, 산문집으로 ‘두레박’(1986), ‘꽃삽’(1994) 등을 펴냈다. 새싹문학상, 여성동아대상, 부산여성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고,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시를 쓰고 좋아하는 한 수녀가 있었는데, 그 수녀는 주변의 사소한 사물과 자연, 인간을 신앙 안에서 애정으로 바라보며 시로 썼고, 그 시를 생활 속에 적용시키면서 시의 집을 지어서 시를 바다처럼 만들어서, 많은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그래서 그녀는 시로 살다가 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 자체가 이미 시가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어린이 동화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고, 제가 알거나 감명받은 사람에 대한 인물시를 쓰고 싶어요.”
―일터 ‘해인글방’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여기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본원이고, 130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어요. 제가 일하는 곳은 1997년 개소한 ‘해인글방’으로, 옛날에는 유치원 교실이었어요. 저는 이곳에서 시만 쓰는 게 아니고, 여러 일을 합니다. 방문객들이 오면 프로그램을 짜서 같이 시도 읽고, 교도소에서 편지나 성경책을 보내달라고 하면 편지를 써서 보내고 물건도 전달하죠. 마치 심부름센터장, 작은 우체국장 같은 생각이 든다니까요. 흰구름 수녀, 국민 이모, 달빛 이모라는 별칭을 좋아합니다.”
1997년 이래 부산 광안리 앞바다를 보면서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해인글방’을 지키고 있는 이해인 수녀. 매일 오전 5시 20분부터 시작해 20년 넘게 기도하고 사랑하며 시를 쓰고 나누는 이곳이야말로, 어쩌면 그 자신이야말로 ‘민들레의 영토’일 것이다. “좋은 시란 천 사람이 한 번 읽는 시보다 한 사람이라도 천 번 읽는 시”라며 “수도 생활, 수행자 삶 자체가 시하고 비슷하다. 한 편의 시처럼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름답고, 고고하고, 뜨거운 시 정신 가득한. 죽어도 봄이 되면 다시 새싹을 밀어 올리는 민들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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