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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장만 옮겼더라도…” 후진국형 인재 대체 언제까지

입력 : 2021-06-11 06:00:00 수정 : 2021-06-10 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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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징후 알고도 작업자들 대처 미흡
감리업체 상주직원도 없어 관리 ‘구멍’
관할구청도 사전 점검 한차례도 안 해
저층 허문 건물에 과도한 살수도 원인

2년 전 잠원동 붕괴사고 때와 판박이
시민들 “공사장옆 불안해서 못다녀”
10일 오후 광주 동구청에 설치된 재개발 붕괴사고 합동분향소에서 시민들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 학동 건물 붕괴는 이상징후를 미리 안 작업자들의 안일한 대응과 위험한 정류장을 옮기지 않는 등 총체적인 부실이 낳은 후진국형 인재인 것으로 드러났다. 대형 인명피해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누구도 이를 개선하지 않았다.

◆사전징후 알고도 작업자만 대피해 화 키워

지난 9일 철거 건물이 무너질 당시 특이 소음이 나는 등 이상징후가 보였다. 당시 작업현장에 있던 굴삭기 운전기사 등 9명은 붕괴를 직감하고 곧바로 대피해 화를 면했다. 하지만 작업자들이 대피하면서 인도만 통제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통을 사고 있다. 건물 붕괴 시 도로의 차량을 덮칠 수 있는데도 도로를 통제하지 않아 대형 인명피해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위험이 상존한 시내버스 정류장 위치를 옮기지 않아 결국 인명피해로 이어졌다. 주민들은 “공사기간만이라도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정류장을 잠시 옮겼더라면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참변이 일어난 정류장은 동구 지원동과 무등산 방향으로 진행하는 14개 노선버스가 정차하는 곳으로, 출근 시간대에는 수백명이 이용한다. 위험한 정류장을 피해 일부 주민들은 300~400m 떨어진 또다른 정류장까지 걸어서 이동해 버스를 이용했다. 재개발사업과 위탁 철거공사를 진행해온 시공사, 시행사 측 어느 누구도 정류장 이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사현장 인근에 신호수 2명만 배치했다.
 

 

 

◆과도하게 물 뿌리고 감리자도 없어

전문가들은 비산먼지를 줄일 목적으로 건물에 과도하게 많은 양의 물을 뿌린 것도 붕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철거업체 관계자는 “사고 당일 살수펌프 8대로 10t 정도의 물을 철거 건물에 뿌렸다”고 밝혔다. 일반 건물보다 2배 정도 많은 물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과도한 양의 물이 기둥과 외벽으로 스며들어 건물을 쓰러뜨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도로변에 있는 건물 철거 시 먼지 때문에 발생하는 민원을 차단하기 위해 많은 양의 물을 뿌린 것이 건물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벽체가 도로쪽으로 밀리면서 한순간에 허물어진 것 같다고 추정했다.

건물 철거 당시 현장에 관리감독을 전담하는 감리업체 직원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들은 해체작업의 위험성을 고려하면 현장에 감리자가 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감리 일지를 작성하고 보고하려면 위험하고 중요한 공정을 직접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재개발지구 시공사인 권순호 HDC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는 “감리업체는 비상주감리로 계약이 돼 있어 당시 현장에는 상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상주냐, 비상주냐에 대한 문제는 철거계획서에 따라 공사가 이뤄진다”고 답했다.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구역 철거 건물이 붕괴하기 4시간여 전인 9일 오전 11시 37분쯤 철거 공사 현장 모습. 건물 측면 상당 부분이 절단돼 나간 상태에서 굴삭기가 성토체 위에서 위태롭게 철거 작업을 하고 있다. 광주경찰청 제공

지자체도 건물 붕괴 전 안전사고 예방 등을 위한 사전점검 등은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다. 임택 광주 동구청장은 이날 상황실에서 브리핑을 열고 “건물 철거계획 허가 이후 단 한 차례도 구청이 나서 자체적으로 현장점검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조현기 건축과장은 “사고 이전 여러 건물 철거과정에서 분진과 소음 등에 관한 민원이 3∼4차례 발생해 점검한 적은 있다”면서도 “현장 감리단이 있기 때문에 구청이 나서 위험요소를 사전에 파악하거나 제거하기 위한 점검은 이뤄지지 않았고 필요성도 못 느꼈다”고 설명했다.

동구는 “현장 시공사를 담당한 A기업 대표와 감리를 담당한 B건축사사무소 소장 등 2명을 고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원청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은 A기업과 하청계약을 맺고 현장 철거작업을 맡겼고, 주택개발정비사업조합은 B건축사사무소에 현장 관리감독을 위임했다.

◆잠원동과 유사한 인재 재발

이번 철거 건물 붕괴 사고는 2년 전 서울 서초구 잠원동에서 발생한 사고와 닮은 꼴이다. 2019년 7월 4일 오후 2시 23분쯤 잠원동에 있는 지상 5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이 철거작업 중 붕괴됐다. 현장 옆 왕복 4차로를 지나던 차량 3대가 무너진 건물 외벽에 깔렸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여성은 매몰 약 4시간 만에 구조됐으나 숨졌고, 동승자 등 3명이 다쳤다. 피해자들은 결혼을 앞두고 결혼반지를 찾으러 가던 길에 참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날 잠원동의 한 먹자골목에서 만난 일식점 사장 임모(54)씨는 “건물 크기도 비슷하고 내부에서 붕괴 조짐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도 닮았다”며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공사장 옆은 불안해서 피해 다닌다”고 말했다. 당시 사고를 목격했다는 또다른 식당의 직원 이모(60)씨도 “사고 이후 공사장 자체를 무서워하게 됐다”며 “안전관리를 잘 못 했기 때문에 사고가 벌어지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철거 현장에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해 현장소장과 감리보조 등 2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및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또 건축주 2명과 건축주 업무대행, 감리, 굴삭기 기사, 철거업체 대표 등 6명을 불구속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2019년 7월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잠원동 신사역 인근 한 철거 중인 건물 외벽이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한 가운데 인근 차량이 사고 영향으로 넘어진 전신주에 깔려 있다. 뉴시스

◆재개발 사업 추진 전반으로 수사 착수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광주 철거건물 붕괴 사고 관련 경찰이 압수수색을 벌이는 등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재개발사업 관계자 등을 참고인으로 소환 조사했고, 합동감식을 벌였다.

 

광주경찰청은 10일 철거업체인 현대산업개발 광주 현장사무소, 철거업체 2곳, 감리건축사무소 등 5곳에 수사관들을 보내 압수수색을 했다. 경찰은 철거 과정의 각종 위법 사항과 업무상 과실 등을 규명하기 위해 사고 발생 하루 만에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참고인으로 조사한 철거업체 관계자 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광주경찰청은 국가수사본부의 지침에 따라 합동수사팀을 수사본부로 격상해 사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수사본부는 광주경찰청 수사부장이 본부장을 맡았다. 강력범죄수사대와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 등 수사관 40여명으로 꾸려졌다.

사상자 17명이 발생한 철거건물 붕괴사고와 관련해 경찰이 10일 오후 광주 동구 학동 4구역 재개발사업 시행사인 현대산업개발의 현장사무소에서 압수품을 챙겨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전날 사고 발생 후 강력범죄수사대는 13명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해 진술을 청취했다. 13명 중 10명은 철거 관련 현장 관계자 등이고, 2명은 목격자, 나머지 1명은 관련 업무를 담당한 공무원이다

 

강력범죄수사대는 철거작업과 건물 붕괴 전후 경위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방침으로 알려졌다. 굴삭기로 건물 뒤편 벽체를 허물기 전 수직·수평 하중을 고려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만큼 공정 전반을 살필 예정이다. 철거 현장 바로 앞이 인도, 차도인 점 등으로 미뤄 세심하게 안전 조치를 했는지를 함께 조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찰은 붕괴 조짐이 일자 작업자·신호수들이 현장을 대피했던 것으로 보고 시공사와 철거업체 관계자들을 상대로 안전 수칙 준수·업무상 과실 여부를 밝힐 계획이다.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사고가 난 재개발사업의 철거 인허가 과정뿐 아니라 재개발사업 추진 전반에서 문제가 없는지 집중적으로 수사할 방침이다.

 

이날 오후 2시에는 경찰과 소방본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이 참여해 사고현장과 시내버스 등을 대상으로 합동감식을 진행했다. 관계기관은 현장에 남겨진 붕괴물, 사고 직전의 철거작업 전반을 확인하는 데 주력했다. 국과수는 현장 감식과 별도로 사상자 17명이 탑승한 시내버스 차체를 광주과학수사연구소로 견인해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책임 통감” 광주 동구 학동4구역 재개발사업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 정몽규 회장이 10일 광주시청 브리핑룸에서 철거 건물 붕괴 사고와 관련해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광주=뉴스1

◆정부, ‘건축물사고委’ 꾸려 붕괴원인 직접 조사

 

정부가 광주 건물 붕괴 사고의 원인을 직접 조사한다.

 

국토교통부는 17명의 사상자를 낸 광주시 동구 학동 건물 붕괴 사고를 조사하기 위해 ‘중앙건축물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고 10일 밝혔다.

 

건축물관리법은 대형 사고의 경우 국토부 장관이 중앙건축물사고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직접 사고 원인 등에 대한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위원회는 광주 사고 현장에서 안전 규정이 소홀해 사고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조사해 위법사항이 확인될 경우 엄중히 조치할 방침이다.

 

노형욱 국토부 장관은 사고 현장을 방문해 전국 철거공사 현장에 대한 긴급 안전진단을 실시 계획도 밝혔다. 이날 노 장관은 유가족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달하고, 현장 관계자들에게는 “피해자와 가족들을 위해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조치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했다.

10일 오전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이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지역 철거건물 붕괴 참사 현장을 찾아 현황 브리핑을 청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노 장관은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에 중점을 두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국의 모든 철거공사 현장을 대상으로 지방자치단체들과 합동으로 긴급 안전점검을 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불법 다단계 하도급 공사와 부실 감리 의혹 등에 대해서는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을 아꼈다.

 

정몽규 HDC현대산업개발 회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사고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고개를 숙였다. HDC현산은 사고현장인 학동 4구역 재개발사업의 시공사다.

 

정 회장은 “회사는 사고 피해자와 유가족분들의 피해 회복, 조속한 사고 수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이런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전사적으로 재발 방지대책을 수립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권순호 HDC현산 대표이사는 감리자의 현장 부재 논란에 대해 “비상주 감리로 계약됐고, 사고 났을 때는 감리자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불법 재하도급 의혹에 대해서는 “(철거공사를 맡은) 한솔기업과 계약 외 재하도급은 주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광주=한현묵 기자, 이종민 기자, 광주=이보람 기자, 박세준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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