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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엽의고전나들이] 개와 말, 귀신과 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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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3-04 23:41:14 수정 : 2021-03-04 23: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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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려보면 제일 어려운 게 사람 얼굴이다. 얼굴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살아온 이력이 담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어렵지 않은 게 없겠다. 몇 백만년을 지내온 산도 그렇겠고, 마을 어귀의 수백 년 된 나무도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람 얼굴이 그리기 어려운 까닭은 어쩌면 그 친숙함에 있다. 늘 대하며 늘 보고 늘 살피는 것이 바로 얼굴이어서 조금만 다르면 아주 다르다고 느끼기에 함부로 했다간 금세 들통이 나는 법이다.

‘한비자’에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齊)나라 임금이 화공에게 무엇이 제일 그리기 어려운가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개와 말이 어렵다고 했다. 가장 쉬운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번에는 귀신과 도깨비라는 것이다. 개나 말은 늘 가까이서 보는 것이어서 조금만 잘못 돼도 사람이 알아보지만, 귀신과 도깨비는 본 사람도 적고 보았다는 것도 제각각이어서 아무렇게나 그려도 그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가장 쉬운 일, 이른바 일상사를 편안하게 가꾸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한비자 같은 현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삶의 요체가 바로 그런 데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가까운 데 있는 게 분명하고, 가까운 데서 출발해서 멀리 가는 것이 유가(儒家)에서 추구하는 학문의 본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가까운데, 친숙한 것이 천시받는 느낌이 부쩍 늘었다. 빌보드 차트를 누비는 가수가 아니라면, 고향 축제의 초대가수쯤은 학예회 수준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을 내려다보기 시작할 때, 그렇게 보는 이의 삶이 이미 길을 잃는 수가 많다.

물론, 개와 말을 잘 관찰한 사람이 꼭 귀신과 도깨비를 잘 그린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전문분야라는 게 있어서 개를 잘 그리는 사람 따로 도깨비 잘 그리는 사람 따로 있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것을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게 되면, 멀리 있는 것들은 더더구나 대충 그리기 쉽다. 반대로, 보이지 않거나 눈앞에 없는 것을 상상해서 채워 넣는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깊이 있는 본질에는 이르지 못하고 피상적인 재현에만 머물 공산이 크다. 개도 잘 그리고 귀신도 잘 그리기가 그래서 어렵고, 아무나 다 대가가 못 되는 이유 또한 그리 대단한 데 있지 않겠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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