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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 1월25일∼1월31일] 소련군을 베를린에 불러들인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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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1-24 23:12:50 수정 : 2021-01-24 23: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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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월25일 독일군이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발악처럼 벌인 ‘벌지 전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반년 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독일군 전력은 참담히 손상된 상태였다. 그래도 1944년 12월26일 프랑스와 벨기에 접경지대인 아르덴에서 개시된 이 대공세가 초기에는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 바람에 서부에서 독일 전선이 주머니가 튀어나온 듯하다 해서 ‘벌지(Bulge·주머니)전투’로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공군력이 허약해져 대공세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무모한 전투를 벌인 히틀러를 비난할 수만도 없다. 육군 하사 출신인 히틀러는 원래 장성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식의 명령을 자주 내리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이 공세로 서부 연합군의 진격은 6주 정도 지연됐으나 독일의 멸망은 6개월 정도 빨라진 셈이었다.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기갑부대 등을 대거 빼돌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벌지 전투가 끝나고 2일 뒤인 1월27일에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되고 4월21일부터는 소련군이 베를린을 공략해 결국 점령한다. 결과적으로 벌지 전투는 소련군으로 하여금 베를린을 함락하게 한 셈이고 그것은 독일인들에게, 특히 독일 여성들에게는 비극이었다. 베를린이 함락된 1945년 5월의 베를린은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강간이 벌어진 점에서 기록적이다. 약 200만의 독일 여성이 소련군에게 당했다. 소련군만 강간을 범했던가?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소련군의 경우는 통제불능에 가까웠다.

이를 두고서 많은 사람들은 소련군의 무지와 야만성을 탓하며 그들에게 몽골 등 동방의 피가 흘러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2차 대전 최대의 피해(사망 1300만)에 대한 보복 심리로 보기도 한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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