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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조차 캐는 한국인… “채집문화가 한류 원천”

입력 : 2020-02-22 03:00:00 수정 : 2020-02-21 20:5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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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박사, 10여년 산고 끝에 / 삶 대미 장식할 시리즈 첫편 출간 / ‘패관’처럼 집단지성 채록·재구성 / 한국인 독특한 문화DNA 이야기
이어령/파람북/1만9000원

한국인 이야기: 탄생, 너 어디에서 왔니/이어령/파람북/1만9000원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이어령 박사가 그의 삶의 대미를 장식할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를 출간했다. ‘너 어디에서 왔니’로 그 시리즈의 첫 권이다.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 초대 문화부 장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낸 저자는 첫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시작으로 지난 60년 동안 무려 10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그러나 최근 10년 동안 무리한 집필로 머리 수술을 받았고, 암 선고를 받아 다시 두 차례의 큰 수술을 했다. 이후 10여년의 혹독한 산고 끝에 시리즈의 ‘탄생’ 편인 ‘너 어디에서 왔니’를 출간하게 됐다.

저자는 스스로 21세기의 패관(稗官)이라고 말한다. 술청과 저잣거리, 사랑방을 드나들며 이야기 꾸러미를 기록으로 챙겨온 조선시대의 패관처럼 온갖 텍스트와 인터넷에 떠도는 집단 지성을 채록하고 재구성해 ‘한국인 이야기’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책은 ‘꼬부랑 할머니’ 동요처럼 ‘태명 고개’를 시작으로 ‘배내 고개’, ‘출산 고개’, ‘삼신 고개’, ‘기저귀 고개’, ‘어부바 고개’, ‘옹알이 고개’ 등 열두 고개를 차례로 넘어가게 한다. 이 밑도 끝도 없이 꼬불꼬불 이어지던 그 이야기들 속에 한국인의 집단 기억과 문화적 원형이 담겨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는 채집시대부터 이어온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 유전자를 이야기한다. 앨빈 토플러의 오류는 인류 문명의 물결을 농경 시대부터 계산했다고 지적하며 인간 문화, 문명의 텃밭인 수렵채집 시대부터 계산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대우주의 생명 질서가 녹아 있다. 인간의 유전자나 두뇌 등 모든 생장의 조건은 수렵채집 시대 때 형성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정보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에 채집 문화의 흔적을 가장 많이 지닌 집단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정보화 시대를 선두에서 이끌어가는 오늘날에도 나물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그 예라고 한다. 우리는 정보조차도 ‘캔다’라고 말한다. 호미로 나물을 캐던 풍습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음식 문화의 본류도 나물 문화다. 일부러 뿌리를 키워 콩나물을 만들고, 심지어 토끼도 안 먹는 콩잎까지도 먹는다. 채집민은 낯선 열매와 풀을 먹기 전 반드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 정보를 파악했다. 짐승들이 다니는 길, 어디를 가야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는지 생사가 걸린 정보 수집 활동을 매일 해야만 했다. 이 채집형 한국 문화가 한류의 원천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저자 이어령 박사는 “삶의 끝자락에 선 이가 ‘탄생’을 이야기한다는 게 다소 의외다 싶다고 하겠지만, 생명이란 그 자체로 소중한 선물이다.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년 전 진핵 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간다”고 말한다. 파람북 제공

저자는 또 서양인들은 아이의 나이를 셀 때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간은 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 아이를 키운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 된다. 태아는 자신이 알아서 태반을 만들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배 속에서 나갈 때를 결정한다. 주체적 존재인 이 태아에게는 태생기의 거대한 생명 질서, 우리가 모르는 대우주의 생명 질서가 있다. 태중의 아이를 한 살로 보는 중요한 이유다. 이는 자연과 단절된 문화·문명으로 사느냐, 아니면 대우주의 생명 질서를 바탕으로 오늘의 문명과 연결하며 사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또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아기를 안고 자며,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함으로써 엄마 배 속의 환경과 일체가 되려 하는 것이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나라도 한국뿐인데, 이는 태중의 양수가 바다와 성분상 비슷해서란다. 반면 서양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엄마와 분리해 요람에서 재운다. 엄마 배 속, 즉 자연과의 단절이다. 포대기로 업혀 갓난이 시절을 보낸 한국인은 ‘분리 불안’ 같은 말을 모르고 살던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스와돌에 대한 언급은 흥미롭다.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갓난아기가 태어나면 즉시 발끝에서 목까지 붕대 같은 천으로 칭칭 동여맨다. 그것이 스와돌이다. 그 모양이 누에고치나 이집트 미라와 다를 게 없다. 사타구니나 헝겊 천을 대거나 일회용 기저귀를 채우는 그런 기저귀와는 비교조차 어렵다. 우리의 강보나 기저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우리의 기저귀나 강보처럼 ‘채우다’ ‘입히다’ ‘싸다’ 등이 해당하지 않는다. 스와들링은 ‘감다’ ‘묶다’ ‘두르다’에 해당한다. 스와들링의 사전적인 의미는 ‘자유를 억압하다’ ‘속박하다’ 등의 뜻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만의 독특한 안고 업고 재우는 밀착형 육아의 스킨십문화가 서구로 옮아가버렸다. 저자는 이젠 서구에서조차 낯설어하는 육아법이 21세기 한국의 육아 방식이 됐다고 안타까워한다.

저자의 ‘너 어디에서 왔니’ 후속서는 ‘알파고와 함께 춤을’,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 ‘회색의 교실’ 등의 제목(가제)으로 올해 안에 잇달아 출간된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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