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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웅의역사산책] 지조 높은 국학자 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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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12 23:19:38 수정 : 2025-05-12 23: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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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인 동시에 신념 있는 국학자
얄팍한 권력에 휘둘리는 시대의 사표

시인 조지훈(趙芝薰)이 기관지 확장으로 인해 1968년 5월17일 오전 5시40분에 향년 48세로 별세했다는 소식과 함께 관련 기사가 다수 신문의 지면을 장식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별세 소식과 함께 그가 영면하기 직전에 집필했던 작업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그의 문학적 성취와 함께 국학자 조동탁(趙東卓)의 학문적 성과를 전했다는 것이다.

특히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의 초대소장으로서 국립학술기관에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한국민족문화사대계’ 6권을 기획하고 추진한 장본인이었다. 그가 집필한 ‘한국민족운동사’는 이러한 기획의 산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승무’ 등을 지은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거니와 국학자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는 지조를 역설한 우리 시대의 선비였다. 당시 모 신문에서는 그를 두고 “반일·반공·반독재의 역사를 위해 언제나 민족의 한복판에서 가장 높은 이상을 심어주었고, 때로는 민중의 맨 앞장에 서서 그들에게 삶의 용기를 돋워주었다”고 평가하였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나는 이즈음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기 때문에 조지훈의 별세는 물론 그의 문학적 명망과 학문적 업적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청록파 시인들의 시를 접하고 드디어 ‘승무’를 읽으면서 젊은 날의 번뇌를 엿볼 수 있었다. 질풍노도와 성적 압박으로 점철되는 사춘기 시절에 그의 시는 위로가 되었고 순수를 갈망케 했다. 특히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같은 우리말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음에 국학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그가 일제강점 말기 파시즘 광풍 아래 우리말을 지키고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순수’의 시를 썼음을 넌지시 알게 되었다. 반면에 일제강점 말기 다수의 지식인들은 ‘순수’를 핑계 대며 민족운동을 거부하면서도 막상 일제의 총칼과 감언이설에 접하자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지조를 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1945년 8월15일 광복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독재에 맞서는 고고한 ‘지조’를 역설하며 지식인의 변절을 경계하였음을 어렴풋하게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견지했던 자신의 노선과 이념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쳤으며 솔직한 변명도 하지 않고 권력의 유혹에 몸을 맡기지 않았던가.

그는 말한다.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써 먼저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나에게 조지훈은 여전히 순수와 전통의 ‘시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국학에 대한 열정과 업적을 들여다보면 그의 지조론이 학문적으로 승화하여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격동하는 우리의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고 민족 주체의식의 함양에 힘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과 다양한 실천을, 흘러간 옛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주의자의 항변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얄팍한 권력이나마 나눠 먹기 위해 보수를 변질시키는 작금의 현실에서 그의 삶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시대의 또 다른 사표(師表)가 아닌가.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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