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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나무에게 불러주는 자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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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01 23:37:21 수정 : 2025-05-01 23: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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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에 가족 잃고 마음도 숯덩이
그을린 나무의 초록잎 슬퍼 보여
생면부지여도 기꺼이 위로 건네
아픈 마음 달래주는 자장가 같아

서향 나무 꽃이 졌다. 늦게 핀 꽃이 좁은 베란다를 은은한 향기로 채워서, 어수선한 4월을 잔잔히 위로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작고 여린 꽃이 톡톡 떨어지면서 향기도 이내 사라졌다. 화분 위에 떨어진 하얀 별 모양의 꽃들을 보면서 문득 왜 나는 자장가를 불러주고 싶었을까. “봄이 엄마를 데려간다//나는 여기 있는데/봄이 엄마를 데리고 간다//….//저 봄 잡아라/나는 눈을 가린 사람처럼 두 손을 휘젓는다//엄마가 숨을 들이쉬면/세상의 꽃나무란 꽃나무 다 들어갔다가/엄마가 더 이상 못 참고 숨을 내쉬면/세상의 꽃나무란 꽃나무 다 몰려나온다”(김혜순 시인의 ‘저 봄 잡아라’ 부분 인용) 자장가를 부르다가 함께 잠들어 꾼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이미 작년 봄은 어머니를 데려갔다.

어머니는 떠나기 한 달 전쯤 말문을 닫으셨다. 영혼이 맑은 식물처럼 까만 눈동자만 굴리고 있을 뿐 아무 말도 못 하셨다. 불과 그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병상에서나마 함께 손잡고 ‘클레멘타인’을 부르기도 했다. 유난히 그 노래만은 끝까지 가사를 기억해서 까랑한 목소리로 부를 수 있던 노래였다. 그러나 그 시간도 짧게 지나갔고, 자작나무같이 얼굴이 백지장이 된 어머니와 눈을 맞추면서 나는 몇 번이고 클레멘타인을 불러주었다. 어머니의 첫 기일이 되니 자작나무의 까만 옹이만 봐도 그 옆에 붙어 서서 클레멘타인을 부르고 싶어진다.

천수호 시인

영남 지역의 괴물 산불이 31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숯검정이 된 것은 숲만이 아닐 것이다. 가족을 잃은 이들의 마음은 숲의 흔적만큼이나 오래 복구가 어려울 것이다. 시커멓게 그을린 숲이 그들의 고통을 읽게 하므로 유족들에게 불탄 흔적의 현장은 살아있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산불이 지나간 야산에는 검은 숯이 된 나무들 곁에 간혹 화마가 비껴간 초록의 나무들이 보인다. 나무의 유족들인 셈이다. 홀로 초록 잎을 틔워야 하는 안간힘의 노래가 그렇게 즐거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곁에 선 나무가 불길에 휩싸일 때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었을까. 현악기 같은 비명이 불타는 숲에 크게 울렸을지도 모른다.

삶의 이력이 악기를 만드는 것일까. 가문비나무는 현악기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식물분류학자인 허태임씨는 최근 발간한 ‘숲을 읽는 사람’에서, 언젠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씨가 명동성당에서 샤콘을 연주하던 모습을 보고 “가문비나무가 다 같이 모여 부르는 추모곡 같다. 아니 가문비나무가 저승에서 쓸쓸히 추는 군무 같다”고 표현했다. 나는 그것을 자신의 슬픔을 기억하고 있던 가문비나무가 훌륭한 연주자를 만나 마침내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바이올린 연주는 나무가 제 감정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할까. 어쩌면 옆에 서 있던 나무의 비극을 지켜본 아픔까지도 고스란히 연주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공명(共鳴)을 ‘소리의 파장’보다 “함께 우는” 것으로 직역하게 된다.

사실 직접 고통을 겪는 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옆에서 지켜보는 이도 고스란히 고통을 함께 감내하게 된다. 그런데 가족이 아니어도 기꺼이 고통을 함께 나누려 자청하는 이들도 있다. 작년 어머니가 말도 웃음도 다 잃었을 때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언제든 와서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고팔만 선생이었다. 기타 하나를 메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그는, 죽음을 맞거나 병마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할 일이 없을까 늘 고민한다. 식물의 삶으로 변해가는 아픈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주기 위해 그는 여러 해 동안 음악 치료사, 심리 치료사, 경혈 지압사, 요양 보호사, 호스피스 도우미 등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친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타 연주를 해주고 아픈 곳을 만져주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생면부지의 관계에서 눈물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거대한 숲에 때로는 화마(火魔)가 지나가도, 그 화마에 그을린 숯검정의 나무를 잠재우는 이런 자장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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