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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바빠 한글 배울 시간조차 사치였다" 동네 구두닦이 아저씨의 굴곡진 인생사 [강승우의 땀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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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5-04 11:00:00 수정 : 2024-05-05 18: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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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우의 땀터뷰] 첫 주인공 정헌일씨

8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학교 못 다녀
“한글 몰라” 자동차 제조회사 작업반장 거절
“살기 바빠 한글 배우는 시간도 사치로 여겨”
염전 일 2년·광부로 8년…분식집·엿장수·목수도
구두닦이 25년… 매년 번 돈 일부 이웃에 기부
“구두란?” 묻자 “쌀과 같다…덕분에 먹고 살아”
‘땀터뷰’는 우리 동네 소시민들이 흘리는 땀방울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그들 일상 속으로 들어가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인터뷰입니다. 모두 공감하는 재미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언제나 푸근하게 볼 수 있는 옆집 아저씨, 단골가게 이모 같은 사람들이 사연의 주인공들입니다. 주인공이 되고픈 분들은 주저 말고 연락주세요. 고민은 기사만 늦출 뿐입니다.

 

땀터뷰 첫 번째 사연의 주인공은 “구두 닦아요”를 외치며 20여년 동안 경남경찰청과 경남도청 등 경남지역 관공서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출몰하는 정헌일(67)씨.

 

이 아저씨를 10년 넘게 거의 매일 봤지만 정작 ‘구두닦이 아저씨’라는 것 말고는 이름은커녕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경남지역 관공서를 돌며 구두닦이 업이 천직이라는 정헌일씨가 환하게 웃으며 구두를 닦고 있다.

생업상 진행하는 인터뷰를 위해 이제야 그에게 이름과 나이를 물어 보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새까만 구두약이 얼굴에 묻은 줄도 모르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한 웃음을 짓는 그는 이 일이 무척 재밌다고 했다.

 

그가 살아온 인생이 궁금해 열심히 구두를 닦는 와중에 이것저것 물어봤다.

 

귀찮을 법도 한데 긴장한 것도 잠시 한번 말문이 트이자 자신의 굴곡진 인생사를 거침없이 내뱉었다. 오늘은 정헌일씨의 인생을 엿들어보자.

 

◆먹고 살기 위해 8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

 

그가 두살 때 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엄마 홀로 4남매를 키웠다. 때문에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한창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할 어린 나이임에도 엄마의 짐을 덜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정확히는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 그의 나이 여덟살 때 남의 집 머슴살이였다. 하루 종일 허드렛일만 죽어라 했다. 그래서 또래 아이들이 가던 학교를 그는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열네살이 되던 해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머슴살이를 청산했다.

 

누나가 있던 울산으로 넘어가 판금 기술을 배워 자동차 제조회사에서 일하게 됐다.

 

남다른 손재주가 있었던 때문일까? 8년 동안 일하면서 자리를 잡아가자 작업반장을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에 대해 그는 “한글을 몰라서 그랬다”고 답했다.

 

생산직에 근무하면 쉽게 말해 몸 쓰는 일만 하면 됐는데, 작업반장이 되면 문서 취급하는 일이 잦아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까막눈’이었던 탓에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굴러 들어온 복을 스스로 차버린 것이었다.

 

그 길로 퇴사하고 컨테이너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는데 여기서도 상황은 반복됐다.

 

1년쯤 지났을 무렵 그의 작업 솜씨를 눈여겨보던 직장 상사가 그에게 작업반장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이 역시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탓에 거절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측은하기도 하면서 한편 답답하기도 해 그에게 “왜 한글을 배우지 않았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하루하루 근근이 먹고 살기 바빴던 나에게 한글을 배워야 할 시간조차 사치였다”는 그의 대답에 난 머리가 띵했다.

 

이런 속사정을 알지 못했던 친구들이 “배가 불렀냐. 왜 좋은 자리도 마다하냐”고 비아냥거릴 때 속상했다고 한다.

 

한글을 못 배웠다는 자괴감에 세상과 담을 쌓고 더 숨어들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인천의 한 염전이었다.

 

이곳에서는 그를 괴롭히던 ‘한글’이 필요 없었다. 그저 튼튼한 두 팔과 두 다리만 있으면 충분했다. 게다가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하니 당시 그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재주가 좋던 그도 땡볕에서 하는 염전 일은 고역이었다. 2년 가까이 일을 하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체력도 달렸지만 사람이 너무 보고팠다.

 

그는 “염전 일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람이 보고 싶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거다. 주변에는 염전 말고는 아무 것도 없고, 거기서 일하는 몇 명 말고는 다른 이들은 코빼기도 본 적 없어 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았다”고 지난 과거를 담담하게 술회했다.

 

우여곡절 끝에 염전 일을 그만두면서 고른 다음 직업은 광부였다.

 

충남 대천의 한 탄광에서 8년 동안 광부 일에 매달렸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 소개로 지금의 부인과 결혼도 했다.

 

보다 안정적인 삶을 원하던 차에 광산도 폐쇄돼 광부 일을 그만두고 분식집도 해보고, 엿장수도, 목수도 해봤지만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은 천직이 된 구두닦이,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이웃 도와

 

그러다 구두닦이를 한번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로 시작한 구두닦이가 천직이 돼 버렸다.

 

경남경찰청 본관 옆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부스가 그의 아지트이다. 온갖 구두약, 구두수선 장비·재료 등 구두닦이 25년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첫 술에 배부를 수가 있었겠냐만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구두 냄새만 맡아도 누구 구두인지, 상태가 어떤지 한눈에 파악될 정도로 고수가 됐다.

 

초창기에는 구두 1켤레 닦는데 2000원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제법 장사가 잘 됐다. 이 일을 하면서 집도 사고 번듯한 가정도 꾸릴 수 있었다.

 

지금은 4000원으로 올랐지만 찾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하루 평균 20켤레. 많이 벌어야 10만원 정도. 주말을 뺀 한 달 그가 버는 수익이 대충 계산이 될 터. 가끔 주말에 막노동도 한다.

 

그가 이토록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기부’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구두닦이를 시작한 해부터 빠지지 않고 자신이 번 돈의 일부를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기부해왔다. 본인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인데 매달 40~50만원가량을 기부하고 있다.

 

그가 평생 경험했던 ‘인생의 허기짐’을 주변을 채우는 기부로 메우려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정헌일에게 구두란?” 그러자 그는 망설임 없이 “쌀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구두를 닦음으로써 내가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 내 현실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서 아주 즐겁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구두닦이를 할 것”이라고 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의 웃음이 환한 것은 새까만 구두약을 묻히고 시간과 공을 들여야만 구두가 반짝거리는 것처럼 인생 역경을 견딘 결과물이 아닐까?


창원=글·사진 강승우 기자 ks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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