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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에 의해 육화된 상상력으로 쓰는 詩 … 그게 내 원칙” [나의삶 나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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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26 20:36:11 수정 : 2024-03-27 09: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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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신작 시집 펴낸 시인 김신용

초등학생 시절 우연히 소설에 심취
방학이면 헌책방 골목 돌며 책 읽어

아버지 갑자기 숨져 집안 풍비박산
중학교도 못 마치고 객지생활 전전

굶주림에 매혈하고 지하도서 노숙
공부하려고 일부러 교도소 수감도

최승호 시인과 인연으로 극적 등단
천상병시상·한유성문학상 등 수상

목괴같은 삶·오동나무 닮은 할머니…
생명력 가득한 인상적 시편 엮어내

둑길 아래에는 사과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밭에는 고목이 다 된 사과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고,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삭은 사과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밑에는 이끼에 덮여 있고 가지들은 삭아서 뚝뚝 부러졌다. 마치 목괴 같았다. 그런데 목괴 사과나무 가지에 빨간 사과가 하나 달려 있는 게 아닌가. 감전된 듯 그곳에 서서 한참 사과나무를 바라봤다. 팬데믹이 닥쳐오기 전 어느 해 늦가을 오전 11시 무렵이었다.

뭉툭한 등걸, 여기저기 붙은 검버섯 같은 지의류들, 한 가닥 남은 가지에 열린 빨간 사과. 그로테스크하고 아름다웠다. 목괴 같은 사과나무 모습은 강렬하게 뇌리를 파고들었다. 어떤 이미지들이 얼핏 스쳐 갔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살다가 지는 어떤 존재의 이미지가. 충주 외곽으로 이사를 온 그는 달래강 둑길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뒤 서둘러 노트에 메모했다.

 

지게꾼, 막일꾼, 뱃사람 등 온갖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뒤늦게 등단한 중견 시인 김신용이 11번째 신작 시집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힘찬 생명력을 형상화하는 한편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어떤 사회성도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서 2년 전 어느 새벽, 그는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서 시를 쓰거나 이미 쓴 시를 고쳐 쓰고 있었다. 이때 문득 목괴 사과나무가 떠올랐다. 다 늙은 자신의 몸이, 오랫동안 쓰고 있는 자신의 시가 목괴처럼 느껴졌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열망하고 분투했던 한 인간이 보였다. 불현듯 시가 툭 튀어나왔다.

“무릎 다 닳은, 목괴가 다 된 늙은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렸다/ 오랜 풍상에 가지 삭아 내려앉고 뭉툭하게 변한 등걸에는/ 검버섯 같은 지의류들이 집을 지었는데, 그 등걸에/ 겨우 한 가닥 남은 가지에 사과가 열렸다 빨갛게 익은 사과./… 그래, 가만히 눈 감으면 보인다. 아직도 ‘걷고 있는 사람’처럼/ 목괴가 다 된 나무의 뭉툭하게 변한 등걸이/ 끈질기게 뻗고 있는 뿌리가―. 아직 살아/ 뜨겁게 땀 흘리며 야윈 두 다리 힘줄 버팅기고 있는 뿌리가―./ 이제는 가지들도 삭아 내려 전신의 검버섯 같은 지의류에 덮였어도/ 일생의, 그 혼신의 힘으로 밀어올린 사과 하나―.// 아직도 ‘걷고 있는 사람’의 눈빛 같은, 발갛게 익은 사과 하나―.”(‘목괴의 시’ 부문)

중견 시인 김신용이 오래된 사과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을 숭고하게 그린 ‘목괴의 시’를 포함해 63편의 시편을 묶은 신작 시집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백조·사진)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11번째 신작 시집.

 

이번 시집은 무엇보다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우리 삶을 관통하는 생명력이 가득한 시편들이 인상적이다.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거처1’), 끊임없이 자기 복제를 하는 미나리(‘미나리’), 억척스럽게 뻗어가는 수박(‘수박’), 몸속의 생체지도에 의지해 3000킬로미터를 날아오는 제비(‘귀한 회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여러 각도에서 재조명한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연작이나 물을 모티브로 다양한 사연을 형상화한 ‘적滴’ 연작도 담겼다.

시편들이 노래하고 있는 강인한 생명력은 중학교 이후 부랑자 생활을 비롯해 지게꾼, 막일꾼, 뱃사람 등 온갖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가 뒤늦게 등단한 시인의 여정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등단 당시 그는 대학로에서 보도블록을 깔고 있었다.

파란만장한 여정을 온몸으로 헤쳐 온 시인 김신용이 경험하고 느낀 생명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그의 작가적 여로는 앞으로 어디로 향해 나아갈까. 김 시인을 지난달 22일 충주 자택에서 만났다.

―‘목괴의 시’ 시편 속의 ‘걷고 있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지.

“노동을 하는 사람,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살기 위해서 걷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 존재들이다. 살기 위해서 수레를 끌면서 빈병이나 폐지를 줍고 다니는 도심 속의 나이 먹은 할머니나 할아버지 역시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이다. 이들의 삶에 대한 의지가 바로 사과 하나 같은 것이다.”

한 번은 마을을 산책하다가 커다란 오동나무 밑에서 떨어진 꽃잎을 본다. 보행기를 하고 운동 나온 할머니에게 무슨 꽃이냐고 물으면서 오동나무와, 오동나무를 닮은 할머니를 대면하게 된다. 시편 ‘오동꽃, 오동나무―두곡 시첩’ 역시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 그러면 이 나무도 할머니 시집올 때 심은 거예요? 하고 농담을 건네자/ ‘그려, 이 시골구석으로 시집와서 첫 딸애 낳자마자 심은 거여!/ 그러나 세월이 하 야속혀서 나무 베어 궤짝 하나 못 맹글고/ 지나 나나 이렇게 늙어만 가고 있는 거여!’ 하며 다시 활짝 웃는/ 할머니의 눈매에도 오동꽃 빛이 물들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오동꽃을 닮아 보여, 할머니의 살아온 날들은 폐가처럼 허물어져 보이지만/ 그 폐가에서 숨 쉬고 있을 젊은 날의 시간은, 저렇게 높게 자란/ 고목이 되어서도 흐드러지게 보라 보랏빛 꽃을 피우는 오동나무처럼 보여/ 굽은 뼈 더 굳지 않게 폐가가 다 된 집에서 아그작 아그작 걸어 나와/ 산모롱이 길 걷는 연습을 하는 할머니의 어깨며 무릎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보랏빛 물든 꽃들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발자국들이 보여―”(‘오동꽃, 오동나무―두곡 시첩’ 부문)

 

―오동나무와 할머니의 생명력이 잘 그려졌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어느 날 오전, 시골 마을 경기 화성시 두곡리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아름드리 오동나무 밑에 떨어진 꽃잎을 보고 보행기를 하고 운동 나온 할머니에게 무슨 꽃이냐고 물으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아름드리 오동나무와 늙은 할머니가 대비됐다. 할머니 역시 젊은 시절 오동꽃처럼 화려하게 피었을 것이고, 지금 아그작 아그작 걷는 모습 역시 맑게 꽃을 피운 늙은 오동나무와 같아 보였다. 재작년에 썼다.”

어느 날 서울역 앞을 지나가다가 들려오는 목탁 소리에 발길을 멈춘다.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니 스님과 사회단체 사람들이 죽은 노숙자들의 영정 사진을 올려놓은 조그만 제단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낯설고 생소하면서도 뭔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시可視가, 가시 같은 날이 있다. 참 낯선 풍경을 보는 날이다. 낯선 풍경이라지만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있구나! 싶은 날이다. 서울역 광장 한편에 작은 제단이 차려지고 향이 피어오른다. 역 지하도에서 광장의 구석진 곳에서 이름 없이 죽어 간 노숙의 넋들을 위한 위령제다. 눈에 보이는 것이 가시 같다. 가시可視가, 가시 같다.”(‘진흙쿠키를 굽는 시간 13’ 부문)

―보이는 가시가, 가시 같다고 했는데.

“서울역이나 남산공원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다. 노숙자나 노가다, 창녀 등 쪽방이나 빈민굴에서 죽으면 시신을 일부러 길바닥에 내놓는다. 그러면 경찰이나 서울시 등에서 시신을 실어간 뒤 장례를 치러준다.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보고 살아왔다. 체험의 세계와 매치되면서 보이는 가시가 가시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진흙쿠키를 굽는 시간이란)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이란 바로 현실세계의 앞면이 아닌 차가운 뒷면을 직시하는 것, 비극적 순간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살기 위해서 밑바닥에서 땀 흘리며 몸부림치다가 쓰러져간 사람들, 암흑물질 같은 존재를 발견하고 기억하는 시간이 바로 진흙쿠키를 굽는 시간이다.”

어느 날 소년은 뛰어가다가 책 한 권이 길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포켓판 책이었다. 표지에는 가면을 쓰고 푸른 망토를 펄럭이면서 건물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추리모험소설 ‘아르센 뤼팽’ 시리즈. 책을 집에 가져가 읽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어린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말았다.

김신용은 초등 2학년 때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2, 3권씩 읽었다. 동네 만화방이나 책방에 있던 소년소녀문고나 추리소설을 거의 다 찾아 읽었다. 방학이 되면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을 순례하면서 책을 읽었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연애소설로 확대됐다. 더구나 동네 친구들과 함께 나가기 시작한 교회 학생회가 여는 시화전이나 ‘문학의 밤’ 행사를 지켜보았다. 이때 어떤 소망 같은 것을 품기 시작했다. 시인 김신용의 문학의 씨가 뿌려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시절, 토목업자인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를 파란만장의 운명 속으로 내던졌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객지로 떠돌아야 했다. 서울역 지하도 안쪽에서 노숙을 했다. 배가 고파서 매혈을 했고,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소년원에 들어갔으며, 공부하기 위해 일부러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서울역 앞 양동 쪽방촌에 방을 하나 잡고 청계천의 지게꾼이 된 뒤에야 떠돌지 않았다. 지게벌이를 해서 며칠 먹고살 돈이 생기면 남산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시를 썼다. 잠깐 통발배를 타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사코 시만은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대학로 보도블록을 까는 인부로 일하던 도중, 최승호 시인과 연결되면서 극적으로 등단하게 됐다.

1945년 부산에서 나고 자란 김신용은 1988년 잡지 ‘현대시사상’ 제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을 비롯해 7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같은 날들의 기록’, ‘환상통’, ‘도장골 시편’ 등이 발표했고,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 등을 출간했다. 천상병시상, 노작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한유성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과 방법은.

“현장성을 중시한다. 체험에 육화돼 있는 상상력이 아니면 시화를 하지 않았다. 허공에 있는 상상력이 아닌, 체험에 의한 상상력에 의해서 시를 써왔다. 그것이 원칙이었다. 체험으로 육화되지 않는 세계에서 시는 생동감을 잃는다. 아마 제 시가 다른 시하고 변별되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젊은 시절 쪽방에 엎드려 글을 썼던 시인은 결혼해 서울 쌍문동 시절부터 책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다. 전날 밤 9시쯤 잠든 그는 30년 넘도록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철제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하여 발견하고 대면한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자들을, 몸속에 차오르는 새로운 생의 의지를, 우주의 암흑물질 같은 당신을….

“제발, 그 끈질긴 생의 마지막이 끓이는 무념만이라도 따뜻하기를/ 생의 천변에 고인, 지나간 시간의 한순간만이라도 아름답기를”(‘적滴-천변’ 부문)

 

시인 김신용은…  ●1945년 부산 출생 ●중3 때 학교를 그만둔 이래 노숙자, 지게꾼, 막일꾼, 뱃사람 등 밑바닥 생활 전전 ●1988년 잡지 ‘현대시사상’ 제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같은 날들의 기록’, ‘환상통’, ‘도장골 시편’ 등과 장편소설 ‘달은 어디에 있나’, ‘기계 앵무새’, ‘새를 아세요’ 등 출간 ●천상병시상, 노작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 한유성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충주=글·사진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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