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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나는 백석이다』 이동순 “백석의 영혼에 빙의돼 그의 말을 열심히 대필하며 옮겨 적었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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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3-20 07:30:00 수정 : 2024-03-19 15:5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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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국의 인물을 500명 정도 선정해 시리즈로 낼 계획인데, 작가님께서 시리즈의 선두에서 백석을 다룬 책을 한 권 내시면 어떻겠습니까. 지난해 늦봄 출판사 대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더구나 긴 글이 아니라 원고지 500매 분량 정도라고 했다. 백석 시인이라, 백석 시인⋯. 그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시 전집을 펴냄으로써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자리 잡은 시인 아니었던가. 오죽했으면 또다른 출판사 대표는 ‘백석학’의 물꼬를 튼 주인공으로서 본격적 평전을 한 번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을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4년, 스물네 살의 대학원생 이동순은 거의 매일 대학원 동기생 두 명과 함께 대구시청 앞에 위치한 고서점 거리를 순례했다. 이들 고서점에는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이들이 뿌려놓은 좋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는 주로 문학, 특히 오래된 시집을 찾았다. 수업 시간에 배우지 못한 시인들의 이름이 쏟아졌다. 대개가 북으로 간 시인들이었다. 이때 낙본 문학전집 『현대조선문학전집』을 보게 됐고, 여기에서 시인 백석을 만났다. 백석의 시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동순 작가.

“한때 주변에 오해를 많이 샀습니다. 너는 사상이 붉은 쪽이냐, 왜 북으로 간 시인들의 시에 관심을 갖고 자꾸 모으느냐. 선배들은 말하더라고요. 조금 수상한데. 불편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친한 후배들에게 책을 빌려주다가 그 다음부턴 딱 끊어버렸죠. 저는 그때 문학책뿐만 아니라 고음반 등 알려지지 않은 자료, 빛을 보지 못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는 데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흰 ‘백(白)’자가 들어간 시는 무조건 찾았다. 백석(白石)의 시도 나왔지만 백철이나 백신애 등의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실망의 연속. 그럼에도 언젠가 백석 시 전집을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를 모으고 모았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백석의 시를 한 편 두 편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거의 100편쯤 모이자, 그는 1987년 10월 『백석시전집』을 출간했다.

책은 장안에 화제를 낳으며 불티나게 팔렸고, 백석 시와 시인을 재평가하는 글이나 논문 역시 쏟아졌다. 백석은 일약 한국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부상했다. 다른 많은 월북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 재평가 작업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 동안 한국 현대문학사에선 다룰 수 있는 문인과 다룰 수 없는 문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백석은 다룰 수 없는 금단의 영역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 전집 출간을 계기로 백석 연구가 획기적으로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분단에 의해 매몰돼 있던 다른 많은 문인들도 다시 소환되는 기폭제가 됐어요. 분단 때문에 일그러진, 왜곡된 한국 현대문학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이후 젊은 백석과 한 때 사랑을 나눴던 ‘자야’ 김영한 여사와 연결되면서 젊은 백석의 러브스토리를 밝혀냈고, 백석문학상이 제정되도록 설득했으며, 안도현 작가가 『백석 평전』을 집필할 때도 서로 만나 깊이 논의했다.

 

진즉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런저런 연구와 다른 책을 내느라고 시작하지 못했던 그는 마침내 백석 일대기를 쓰기로 했다. ‘왈칵’ 써내려갔다. “나 백석은 1912년에 태어났다. 임자생, 본명은 백기행이다. 쥐띠다. 그해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11년 전의 일이다. 나라의 주권이 불과 두 해 전에 이민족인 일본에 강탈되어 무참하기 짝이 없는 식민지가 시작된 초입이다.”(33쪽)

 

중견 시인 이동순이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 백석의 일대기를 1인칭 시점으로 조명한 책 『나는 백석이다』(일송북)를 최근 펴냈다. 시인은 책머리에서 “어떤 측면에서 나는 백석 시인의 영혼에 빙의가 되어 당신의 말씀을 단지 열심히 대필하며 옮겨 적었을 뿐”이라며 “비록 저자명이 내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긴 하지만 실질적 저자는 백석 시인”이라고 적었다.

 

책은 백석이 고향인 평안도 정주에서 어린 시절 가졌던 꿈과 공부, 일제하 서울에서 공부와 글쓰기, 신춘문예 단편소설을 통한 등단과 일본 유학,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와 시인으로 선회, 첫 시집 『사슴』의 발표와 문단의 평가 등을 차례로 담았다. 기생 ‘자야’와 은밀하게 펼쳐진 러브스토리도.

 

“나는 돌연히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서 그 기생의 손등을 슬며시 포개어 잡았다. 기생은 움찔하며 당황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몹시 놀라는 그런 기색을 차마 나타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앉은 채로 상체를 기생 쪽으로 약간 기울이고 얼굴은 마치 시치미를 떼듯 맞은편을 향해 보면서 소곤거리는 말투로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마누라니 그리 알아요.’ 너무도 느닷없는 돌출 발언에 놀라 기생의 얼굴에는 한순간 홍조가 서렸다.”(130쪽)

 

책은 이어서 만주 유랑 시절 느낀 허탈감, 해방된 고향과 북한 문단과의 불화, 삼수갑산 관평리 협동조합에 유배된 분노와 회한, 여든 셋을 산 삶의 허탈과 덧없음 등 알려지지 않은 백석 이야기도 담담하게 그려나간다.

 

“나는 해발 800미터의 가파른 관평리 언덕길에서 그저 처연하고 볼품없는 늙은이로 시들어갔다. 회갑을 지나고 고희도 훌쩍 지나 등도 굽고 허리도 구부정한 팔순 노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관평리의 그 언덕길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가다가 쉬곤 하면서 터벅터벅 걸어 다녔다. 자, 내 고백을 들은 한국 독자 여러분의 느낌은 어떠하신가. 독자 여러분께서 내 말년의 이런 정경을 생각하신다면 참으로 가슴이 따갑고 명치끝이 아려 오실 것이다. 참 모질고 끈질긴 것이 사람의 수명이다. 이렇게 나는 그 험한 북조선의 관평리에서 여든셋까지 살았다.”(241쪽)

 

시인 백석을 대중적으로 부활시킨 ‘백석 전문가’ 이동순 작가가 바라본 백석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쓴 백석 일대기는 이전 평전과 어떻게 다를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이 작가를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일대기 집필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어서 그런지 어렵지 않게 왈칵 썼다. 왈칵 쓰고 나서 더 보강을 했다. 다 쓰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후련했다. 시인을 생각하면 여러 감회가 많은데, 이번 책을 내면서 시인에게 하고 싶었던 말, 제 나름대로의 해석을 다 쏟아내고 나니 후련한 생각이 들고 마음의 빚도 어느 정도 갚은 것 같아 흐뭇하다.”

 

―이미 백석 평전이 제법 나와 있는데.

 

“백석 시인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뜨거웠다. 그는 한국 시인들 사이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나 많이 영향 받은 시인 평가에서 늘 1위였다. 다만, 백석에 대해 너무 흥분한 탓에 상상으로 접근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평전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두어 권의 책을 봤는데, 하나는 터무니없는 내용과 연결하고 있어서 읽다가 집어던지는 수준이었고, 또 다른 것은 백석을 너무 바람둥이나 여성 편력자로 보고 있더라. 백석이 여자를 보는 관점이나 기호가 남다른 점은 있지만 희대의 바람둥이로 볼 건 아니다. 기존 백석 평전과 달리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은 꽤 잘 쓴 것으로, 비교 불가다. 백석 시의 장점을 자기화하는 한편, 백석의 삶과 시대에 대한 자료조사도 많이 했더라. 안 시인이 저에게 와서 2박3일을 같이 자고 먹고 하면서 함께 원고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기존 평전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쉽게 풀어쓴 백석의 일대기, 백석이 주인공으로 나온 회고록 같은 일대기에서 차별성이 있다. 시인 자신이 지난 세월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실감을 강화하는 화법을 썼다. 사실 직접 화법을 쓰려면 굉장히 용감해야 한다. 시인에 푹 빠져 온 지가 수십 년이니까 제 속에 육화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시인의 어떤 퍼스널리티를 대신해 이야기할 만한 자신이 있었다. 여러 사람에게 원고를 보였는데 모두 재미있다, 진짜 시인의 육성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

 

―내용적 차별성이나 특징이 있다면.

 

“시인이 북에서 숙청당해 해발 800m의 관평리 산중에 있을 때 그 마음의 황폐함이나 자녀들로부터 받은 심정적 고통은 기존 평전에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이번에 포커스를 둬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시인의 후반부 생애에 주목한 것인지) 시인의 생애 전반부는 대체로 순탄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유학생이 되고, 문단에 나왔을 때 찬사를 들으며 모든 게 잘 풀려나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자인 백석의 마음에 교란이 일어난 것은 일제 말기 조선말을 폐지하고 조선일보 안에서도 여러 심정적 구속감, 불편이 생길 때였다. 만주 신경으로 도망치듯 가게 되는데, 동거하던 기생 자야에게 같이 가자고 제의했지만 자야는 쌀쌀하게 거절하고 숨어버린다. 만주에 외롭게 가서 고독을 경험하고 살게 되면서 어떤 삶의 고달픔이나 액운, 힘겨운 정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백석은 만주에서 집안의 강권으로 평양의 문경옥과 결혼했지만 헤어지고 이후 평범한 농촌 가정의 여자와 다시 결혼해 평양에서 산다. 특히 1950년대 중후반 아동문학 논쟁으로 비판을 받은 뒤 숙청당해 삼수 관평리 농장에서 힘겹게 살게 된다. 그가 겪은 삶의 굴레를 파헤치고 백석의 마음에 더 포커스를 두고 썼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인데, 그의 연애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대상은 ‘자야’인가.

 

“백석이 연인 자야를 그린 가장 확실한 시는 「바다」다. 자야 할머니 말로는, 함흥 시절 한 번은 싸우고 난 뒤 서로 서먹서먹했다더라. 읽어봐. 백석이 시 「바다」가 실린 잡지를 툭 하고 방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당신이 들어있는 시가 발표됐어. 자야는 토라져 안보는 시늉을 하다가 나중에 시를 읽고 감동해 눈물을 쏟았다고 하더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경우, 자야 할머니는 자기를 노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나 말고 누구를 생각했겠어? 물론 자야가 아니라 통영의 박경련이라거나 제3의 인물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야 할머니는 나 말고 누가 있겠어라고 말했지만, 남자 마음속은 모른다.”

 

―백석 시인은 한국문학사나 한국 시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백석 시인이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다. 무엇보다도 백석 시에 나오는 고향의 모습은 오염되지 않은 산천이고, 고결하게 살아있는 공동체인데, 지금은 다 무너지고 해체돼 있다. 고향과 인간과 생태, 공동체의 회복과 복원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작가는 아울러 “백석 문학의 가장 으뜸가는 성취라면 민족 언어를 더욱 반짝이는 보석으로 갈고 닦고 다듬어서 세계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라고 책머리에서 강조하기도 했다.

 

―‘자야’ 김영한 할머니와 연결돼, 백석 시인의 알려지지 않은 사랑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백석시전집』을 내고난 뒤 한 신문사 신춘문예 예심을 맡게 됐다. 소설가 김성동씨의 신혼방 한 칸을 빌려서 소포행랑 6개에 담긴 예심 작품을 한참 심사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이 백석 시 전집 내신 분입니까? 옛 서울말 스타일의 점잖은 목소리였다. 네, 그렇습니다. 처음엔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아이고, 큰일 하셨고요, 긴히 한번 만나고 싶고 이야기도 듣고 싶고 또 식사도 모시고 싶고. 그러시냐. 직감적으로 무엇인가 와 닿아서 물었다. 혹시 가족 되시느냐. 전화로 긴 말을 할 순 없고, 일단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신춘문예 예심을 후딱 끝내고 할머니를 찾아갔다. 한강변이 바라보이는 서울 동부이촌동 빌라맨션 4층에 살고 있었다. 서로 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뒤 할머니는 당부하더라. 나는 귀하를 백석같이 여길 테니, 앞으로 서울로 올라오거든 딴 데 가지 말고 여기를 스스럼없이 다녀가시라. 세 번째 만났을 때 술을 마시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고, 네 번째 만났을 때 백석과 함께 살던 청진동 집에도 함께 가보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로 10년을 자주 만났다. 나중에는 편지를 스스로 보내왔고, 편지가 40~50통이 모이자 컴퓨터에 옮겨 적고 시간 순으로 정리한 뒤 할머니 이름으로 『내 사랑 백석』을 출간해줬다. 내 이름을 달고 책이 나온다는 게 꿈만 같아. 할머니는 무척 기뻐했다.”

이동순 작가. 

―자야 할머니는 죽기 직전 길상사를 법정 스님에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 요정으로 을사조약에 동의하지 않던 대신의 별장이었다. 결국 일제에 의해 빼앗긴 뒤 총독부에서 비밀 안가로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인수해 비밀정보기관으로 활용했다. 미군정이 떠난 뒤 이승만 정권에 대원각을 양도했는데, 국회부의장을 했던 이재학이 첩실로 고생했던 김영한 할머니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할머니는 한 개인이 소유 관리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고 고민하다가 법정 스님에게 기부하게 된 것이다. (박헌영의 아들로 알려진 원경 스님은 길상사가 원래 남로당의 재산이었다고 주장했는데) 원경 스님이 대원각은 원래 남로당의 재산으로 이를 관리하던 박헌영이 위기에 빠지자 할머니에게 잠시 맡아둔 것인데 할머니가 착복해버린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너무 터무니없는 과장된 허구다. 전혀 사실무근이고, 비약이 심한 이야기다.”

 

텅 빈 도서관 서재에는 많은 문학책이 있었다. 특히 누렇게 빛바랜 시집 한 권이 그의 눈길을 빼앗았다. 이런 세계도 있었구나. 놀란 마음으로 시집을 읽던 그의 마음 한 켠에선 어떤 소망 같은 게 한 줄기 피어났다. 나도 이렇게 써봤으면.

 

방과 후 학교 농장에서 일하는 대신 학비를 면제 받던 대구농림고 ‘농장 장학생’ 이동순은 농장 일을 끝내면 학교 도서관을 찾곤 했다. 혼자 도서관에서 이름도 모르는 시인부터 시작해 김기림, 정지용, 백석 등의 시를 접했다.

 

시의 세계에 빠져든 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흔든 건 신석정의 시였다.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를 비롯해 신석정의 시에는 유독 어머니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어머니라는 말은 그의 심금을 포획해 버렸다.

 

“비오는 언덕길에 서서 그때 어머니를 부르던 나는 소년이었다./ 그 언덕길에서는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빗발 속에 검푸른 바다는 무서운 바다였다.//⋯자욱하니 흐린 눈망울에 산수유 꽃이 들어왔다./ 산수유 꽃 봉우리에서 노아란 꽃가루가 묻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본 나는/ 그예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다.// 보리가 무두룩히 올라오는 언덕길에 비는 멎지 않았다./ 문득 청맥죽을 훌훌 마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그것은 금산리란 마을에서 가파른 보리고갤 넘던 내 소년 시절의 일이었다.”(신석정, 「어머니의 기억」 부문)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한국전쟁 직후 만삭의 몸으로 피난한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를 낳은 지 10개월 만에 먼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 이후 어머니가 세 번이나 바뀌는 등 굴곡진 삶은 그를 칭칭 감아버렸다. 학생 이동순은 벽에 신석정의 시들을 붙여놓고 외우고 또 외웠다. 시인 이동순의 원점이었다.

 

경북대 국문학과에 진학해 「꽃」을 비롯해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쓰던 김춘수 시인을 만났다. 김춘수는 깔끔했지만 역사나 민족, 사회 등 거대 담론을 싫어했다. 이때 ‘온몸의 시학’을 주창한 참여 시인 김수영을 배우면서 리얼리즘을 보충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그의 몸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1950년 김천에서 농사짓던 이현경과 김기봉 부부의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이동순은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왕의 잠」이 당선돼 등단했다. 1989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에도 당선됐다. 등단 이후 『개밥풀』, 『물의 노래』, 『지금 그리운 사람은』, 『가시연꽃』, 『기차는 달린다』, 『아름다운 순간』, 『미스 사이공』, 『발견의 기쁨』, 『묵호』, 『내가 홍범도다』 등 시집 스물두 권을 펴냈다. 2003년에는 10권짜리 서사시 『홍범도』를 발간했다. 평론집으로 『민족시의 정신사』, 『시정신을 찾아서』, 『잃어버린 문학사의 복원과 현장』 등을 펴냈다. 김삿갓문학상, 금복문화예술상, 시와시학상, 경북문화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초창기에는 글 한 줄, 시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고 시를 썼다. 시에서 사람을, 역사를 빼버리면 시가 아니다. 제가 살아온 동시대의 삶의 구체적인 궤적을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애를 썼다. 세월이 갈수록 시가 본래 가지고 있는 서정성에도 충실하게 됐다. 1999년 시집 『가시연꽃』을 발표하면서 서정성으로 무언가를 말해야지, 역사주의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즉, 20, 30대 때에는 현실의 모순이나 부조리에 관심을 가지고 상징적으로 부각시키는 시를 쓰다가 40대 이후에는 자연적 대상에 빠져들어 무언가를 찾아내려고 하고 성찰하고 노력을 했다. 이후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고, 최근에는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확장 중이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기본적으로 시는 쉬워야 된다. 두 번째로 시의 글줄이 독자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삶에 기쁨이나 위로가 돼야 된다. 어떤 사람은 제 시를 보고 너무 싱겁다, 심플하다, 깊이가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쉬운 시는 아무나 쓸 수가 없다. 쉬운 듯 보이지만 문맥 속에 들어있는 상징성이나 그 안에 담긴 것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너무 섣불리 단정하는 것에 서운함을 가지고 있다.”

 

―하루 일상은 어떤지.

 

“요즘에는 새벽 4시가 되면 잠에서 깬다. 머리도 맑고 의욕이 충만할 때여서 시가 고이더라. 써야 할 시를 쓰거나 하지 못한 일을 풀어낸다. 최근 홍범도 장군과 어떤 영적 대화를 했던 시집도 냈는데, 모두 새벽 시간에 이뤄진 것이다. 오전 7시 반에서 8시 사이에 아침을 먹고, 낮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집필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한다. 오후 10시 반이나 11시쯤 잔다.(체력관리는) 젊을 때에는 운동을 많이 했다. 산악자전거를 20년 정도 탄 것 같다. 지금도 집에 기구를 갖춰놓고 저녁마다 한다.”

 

시인은 흰 머리를 휘날리며 이야기를 조곤조곤, 리드미컬하게 들려준다. 그의 말은 부드럽고도 친절해 머릿속에선 마치 손에 잡힐 듯 상상의 그림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어느 새 ‘경성의 모던 보이’ 백석의 옆에서 그를 비스듬하게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마침 고흐의 보리밭 머리를 한 큰 키의 백석은 눈이 펄펄 내리고 있는 경성의 어느 주점에 홀로 앉아 고조곤히 소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서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주점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의 눈길이 문쪽 백열등에 닿는 순간 무엇인가 번쩍이는 게 보였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부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이제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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