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기존의 ‘항거 곤란’ 폐기…폭행·협박죄 인정 수준으로 기준 낮춰

강제추행죄 성립 요건인 가해자의 ‘폭행과 협박’ 행위 판단 기준을 대폭 낮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21일 성폭력처벌법 위반(친족관계에 의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벌금 1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앞서 A씨는 2014년 8월 주거지에서 사촌동생을 끌어안아 쓰러뜨리고 신체 부위를 만지는 등 강제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1심 재판부인 보통군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2심을 맡은 고등군사법원 재판부는 A씨의 물리적인 힘의 행사 정도가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라고 볼 수 없어 강제추행죄 성립 요건인 폭행이나 협박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폭행과 협박이 없더라도 위력 행사 사실이 있으면 인정되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상의 위계 등 추행 혐의만 유죄로 판단해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군검사 상고로 2018년부터 심리가 이뤄진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A씨의 행위가 피해자 신체에 대한 불법한 유형력 행사로, 피해자 강제추행 해당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폭행·협박의 판단 기준이 ‘상대방에게 저항하는 것이 곤란한 정도’로 설정돼 1983년부터 유지되어 온 기존 판례를 이어 나가는 게 시대 흐름과 어긋난다고 보면서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한다”며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현행법 해석으로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피해자의 저항을 강제추행 기준으로 삼는 것이 강제추행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분류하던 옛 관념의 잔재라는 의미다.
아울러 일반 형법에서 폭행·협박죄가 인정되는 수준의 행위만 있다면, 강제추행죄도 폭행 또는 협박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게 맞다는 의미여서 시사하는 바도 크다. 형법 260조 폭행은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유형력의 행사’가 있으면 인정하며, 같은 법 283조의 협박은 ‘상대방에게 현실적으로 공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의 해악 고지’가 있으면 성립한다. 이 기준을 강제추행죄에도 그대로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대법원은 개정 군사법원법에 따라 사건을 군사법원이 아닌 서울고등법원으로 보냈다.
종례 판례 법리를 40여년 만에 변경한 대법원 판단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다만,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을 법 문언 그대로 해석하자는 취지이지 법 해석만으로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취지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비동의 추행죄’는 상대방의 명시적 동의를 받지 않고 신체 접촉 등으로 성적 불쾌감을 야기하는 행위의 처벌을 말한다. 강제추행죄는 A씨 사건과 같이 폭행이나 협박을 수단으로 추행하는 ‘폭행·협박 선행형’과 폭행 자체가 곧바로 추행에 해당하는 ‘기습추행형’으로 나뉜다. 이번 판결은 폭행·협박 선행형에 관한 법리에 한정한 것이라고 대법원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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