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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자 재고용·재직자엔 애사심 고취로 기술 사수 ‘안간힘’ [심층기획-기업들 첨단기술 유출 골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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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3-30 06:00:00 수정 : 2023-03-30 02: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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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수법 현황과 기업 대책 살펴보니

2017년~2022년 9월까지 112건 해외유출
국가핵심기술 등 피해예상액 26조 달해

자료 무단유출·해외경쟁사 재취업에서
장비 자체 반출·징검다리 이직 등 진화

기술유출 주체 53%가 퇴직자로 드러나
기업, 정년연장·복지 증진 등 대책 추진

#1 세계 최대 반도체 노광장비 기업인 네덜란드의 ASML이 지난달 15일(현지시간) 2022년 연간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중국의 산업 스파이 행위를 저격했다. 자사 중국 법인에 근무한 중국인 직원이 2∼3개월에 걸쳐 반도체 기밀 정보를 빼냈다는 것이다. 3주 뒤 네덜란드 정부는 ASML의 노광장비가 대(對)중국 수출 규제 대상에 추가될 것을 시사했다.

 

#2 경찰은 지난 21일 삼성디스플레이의 기술자료를 중국으로 유출한 피의자를 검찰에 송치했다. 전 삼성디스플레이 연구원인 피의자 A는 ‘디스플레이 제조자동화 기술자료’를 무단 반출한 뒤 중국 경쟁업체로 이직해 누설한 혐의를 받는다. 퇴직자의 일탈에 피해를 본 삼성디스플레이는 대책을 고심 중이다.

 

 

전 세계 첨단산업계가 기술 유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원천기술을 탈취당한 기업만의 문제를 넘어 국가 대 국가의 분쟁으로 번지는 추세다. 기업들은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해결책으로 ‘인력 유출 방지’를 꼽으며 정년 연장, 사내 복지 증진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진화하는 기술 유출… 피해액 26조 넘어

29일 국가정보원 등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최근 약 5년간 총 112건의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이 적발됐다. 이 중 36건은 국가핵심기술에 해당한다. 국가핵심기술은 기술·경제·잠재적 가치가 높아 수출 시 정부가 엄격한 보안요건을 요구하는 기술로, 해외 공장에서 활용하려면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기업 규모별로는 중소기업(68건)이 대기업(35건)보다 많았고, 분야별로는 디스플레이(26건), 반도체(24건), 전기·전자(14건) 순이었다. 추산 피해예상액은 26조931억원에 달한다.

기술 유출 수법은 날로 치밀·은밀해지고 있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이전엔 첨단기술 핵심 관계자가 자료를 무단 취득해 국외로 유출하거나 해외 경쟁사에 재취업하는 ‘직접 유출’ 사례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장비 자체를 납품받거나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화했다.

경기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검찰청의 모습. 뉴스1

지난해 수원지검이 적발해 기소한 반도체 세정장비 유출 사건이 이에 해당한다. B사 연구원들은 집단 퇴사한 뒤 새로운 법인을 설립, B회사 및 협력사 직원들로부터 다량의 반도체 세정장비 관련 첨단기술 자료를 무단 취득했다. 이들은 B회사의 첨단기술 자료가 담긴 부품 자체를 공급받아 B회사와 동일한 스펙의 설비를 생산해 수출하면서 도면 등 기술자료까지 유출했다.

퇴사 후 바로 동종업계로 이직하면 발각되기 쉽기 때문에, 해당 산업기술과 연관이 없는 자회사 등에 국내 기업의 연구 인력을 취업시켜 기술을 빼가려는 이른바 ‘징검다리 이직’마저 등장했다. 이 밖에 현지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리서치 전문업체에 핵심 정보를 수집하도록 의뢰하거나, 명목상 공동 연구를 내세우며 자국 연구원을 국내 대학·연구소에 파견해 산업 스파이로 이용하기도 했다.

중소기업은 협력 제안, 대기업과의 거래 관계에서 기술 탈취가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소기업 권리회복을 위한 법률·행정 지원 공익사업을 진행 중인 재단법인 ‘경청’의 박성수 팀장은 “중소기업은 기술 탈취와 한 끗 차이인 아이디어 탈취도 많이 일어나는 편”이라고 말했다. 경청의 지난해 중소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식재산권을 출원하거나 등록한 업체 10곳 중 1곳(9.5%)이 영업 비밀 유출, 기술 탈취 등을 경험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파악한 중소기업 기술 침해 사례는 최근 5년(2017∼2021년)간 280건, 피해액은 약 2827억원에 달한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에 사기가 펄럭이고 있다. 뉴스1

◆“퇴직자 잡고 재직자 충성심 높여야”

기술 유출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지책은 ‘초격차 기술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어려움을 고려해 기업이 내놓은 차선책은 바로 ‘인력 유출 방지’다. 국정원 등에 따르면 기술 유출 주체의 과반(53%)이 퇴직자인 만큼, 정년 이후에도 기술 인재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이 같은 인력 유출 방지책은 주로 최첨단기술이 집약된 반도체업계에서 활발하게 도입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5월부터 ‘시니어 트랙’ 제도를 본격 시행했다. 시니어 트랙은 정년을 앞둔 직원 중 성과 우수자, 삼성 최고 기술전문가 ‘삼성 명장’, 소프트웨어 전문가 등 우수 자격 보유자를 대상으로 정년 이후에도 계속 회사에서 근무할 기회를 주는 제도다.

SK하이닉스는 정년을 넘어서 일할 수 있는 생산현장직과 엔지니어 직급으로 각각 ‘마스터’와 ‘HE’(Honored Engineer)를 두고 있다. 이들은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를 후배에게 전수하는 동시에 긴급한 이슈를 해결하거나 중장기 프로젝트를 맡는 역할을 수행한다.

디스플레이 업계도 마찬가지다. LG디스플레이는 이미 12년 전인 2011년부터 성과가 우수한 연구원, 공정·장비 엔지니어 등을 대상으로 ‘정년 후 연장제도’를 시행해왔다.

재직자의 애사심을 높이는 것 또한 기술 유출 방지책으로 꼽힌다. 임금 인상에 그치지 않고 임직원의 자기계발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삼성전자는 임직원의 자기계발 차원에서 ‘1년에 최소 5(오)일은 나(아)의 성장을 위한 시간으로 쓰자’는 의미의 ‘오아시쓰’ 제도를 도입했다. DS(반도체) 부문은 개인학습실, 강의실, 휴게실 등이 갖춰진 12층짜리 교육 복합공간인 ‘DS동탄에듀센터’를 운영해 자기계발 효율을 높이도록 했다.

일과 후 학업을 병행하고자 하는 임직원들에게 사내 학위 취득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임직원의 카이스트 전기·전자공학부 석사 학위 취득을 지원하는 기존 프로그램을 ‘반도체전문석사’ 과정으로 확대해 총 3년 6학기 동안 참가자들이 학업과 업무를 병행할 수 있게끔 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최대 선고형 징역 2년 그쳐 ‘걸려도 남는장사’ 말 나와…여야, 간첩죄 적용법 발의

 

전 세계가 산업 스파이에게 강력한 처벌을 내리며 재발 방지에 힘쓰고 있지만 국내 업계에선 “발각돼도 남는 장사”라는 말이 나온다. 기술 유출이 적발되더라도 법정 처벌 수준과 양형기준이 낮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최근 3년(2020∼2022년)간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국내 기술 유출 사건에서 대다수가 1년6월형 이하(1심 기준)로 선고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 유출도 1건을 제외하면 최대 선고형이 징역 2년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4명 중 3명꼴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법원의 양형기준이 낮은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2019년 산업기술보호법, 부정경쟁방지법 등이 개정되면서 관련 법정형이 상향 조정됐지만, 양형기준은 2017년 개정 이후 그대로다. 예를 들어 기술 유출 범죄 중 영업 비밀 침해의 경우 해외와 국내 유출 법정형이 5년 늘어나 각각 최대 15·10년으로 조정됐지만, 양형기준은 각각 1년∼3년6개월, 8개월∼2년에 불과하다.

 

기술 유출을 유도하거나 세세한 방법을 전파하는 브로커의 경우 처벌 규정이 아예 없는 실정이다. 산업기술보호법과 부정경쟁방지법상 공범과 교사범 등에 대한 처벌 조항이 명확하지 않아서다. 브로커를 직업안정법 위반으로 처벌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지만, 업계에선 피해 규모 대비 처벌 수준이 너무 낮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업계는 기술 유출을 사실상 반역행위 수준으로 처벌하는 해외 주요국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은 1996년 ‘경제스파이법’을 제정해 국가전략기술을 유출하다 걸리면 간첩죄로 가중 처벌하도록 했다. 법정 최고형은 징역 20년, 추징금은 최대 500만달러(약 65억원)에 이른다. 반도체 강국 대만은 지난해 5월 국가안전법을 개정해 핵심기술 유출에 대해 경제간첩죄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기술 유출 관련 법을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상헌, 국민의힘 조수진 의원은 국가핵심기술을 유출할 때 간첩죄를 적용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간첩죄의 전제가 되는 ‘적국’의 개념을 ‘외국·외국인·외국인단체’로 확대해 간첩죄 적용 범위를 넓힌 것이다.

 

대검찰청은 다음달 새로 출범하는 양형위에 양형기준 조정을 제안할 계획이다.


이동수 기자 d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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