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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 바쳐 청결·세척 문제 해결
‘침묵의 일꾼’ 자기희생에 감동

비누는 응집과 균질함의 산물이다. 물에 젖은 손안에서 미끄러지며 거품을 낸다. 비누가 물과 섞이면 거품을 내는데, 그 거품으로 손에 묻은 땀이나 먼지 따위의 불순물을 씻어낸다. 비누는 미와 추 사이에 말 없이 존재한다. 거품과 세척력이야말로 이것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누는 씻고 싶은 격렬한 요구에 부응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한다. 비누가 우리의 정화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숭고해지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을 테다.

비누는 평상시에는 세면대 옆에 놓인 비누갑 안에서 건조한 상태로 누워 있다. 비누의 메마름은 비누가 침묵을 유지한 결과 때문일 테다. 이것의 단단함은 자연에서 뒹구는 조약돌과 닮았지만 돌은 아니다. 비누의 단단함이 이 사물의 내면 도덕 함량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비누는 닳아 없어지는 계열에 속하고, 그 어떤 사물보다 자기 과업에 충실한 편이다. 비누는 야위는 방식으로 제 빈곤한 삶을 드러낸다. 이것의 덕성은 말 없는 헌신과 두려움 없는 자기희생이라고 할 만하다.

장석주 시인

비누가 우리 욕망, 피로, 배고픔, 분노와 연관되는 법은 없다. 비누가 약탈자 노릇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종 중립적이거나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이 작고 얌전한 사물이 우리를 위대한 영웅으로 만드는 바도 없다. 비누는 그저 제 안에 함축된 시간을, 응축된 에너지와 힘을 풀어내며 우리 인생에 가장 하찮은 방식으로 끼어든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 몸의 청결을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비누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법은 없다.

사람은 비누를 쓴다. 샤워를 하다가 비누가 없으면 당신은 난처해진다. 당신은 마치 구조 신호를 보내듯 욕실 바깥의 누군가에게 비누 좀 줘요, 라고 외친다. 프랑스의 시인 프랑시스 퐁주는 ‘비누’라는 시집을 완성하는데, 비누 해부학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이 시집은 비누를 감싸고 빚은 사색의 결과물이다. “사용하지 않은, 흠 없는, 단단한,/균질한 작은 비누를/종이 포장지에서 꺼냅니다”(퐁주, ‘비누’). 비누는 비활성 상태일 때 단단하다. 이 물건이 거품들로 풀어지며 샤워기 아래 선 우리 신체 구석구석을 씻어낸다. 이 시간은 비누가 청결이라는 방식으로 우리 노동과 수고에 대한 보상을 베푸는 지복의 순간이라 할 만하다.

비누는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데, 유용한 사물이다. 비누는 늘 청결 문제를 해결하는 사물로 주목받는다. 청결은 인간 신체에서 분비해내는 오물들, 즉 똥과 오줌에서 멀어지는 행위다. 청결이 근대 이후 인간 도덕 기원의 발생론적 근거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비누가 우리의 도덕적 완성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기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누는 인간 신체의 청결 유지에 보탬이 되는 한에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고양되는 데 미력하나마 보탬이 될 뿐이다.

비누는 시간과 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물이다. 비누의 단단함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직 시간밖에 없다. “시간은 만물의 보이지 않는 영혼,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진리처럼 우리 경험에 붙어 다닌다.”(로버트 그루딘, ‘당신의 시간을 위한 철학’) 그렇다. 비누는 시간이 그렇듯 보이지 않는 영혼이고, 우리 곁에 머물며 우리 경험에 밀착한다. 비누는 세척에 능한 일꾼이지 망가지고 부서진 것을 복원하는 일꾼은 아니다. 비누가 우리 영혼의 점진적 성장이나 내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가진 게 많지 않지만 제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내놓는 비누의 자기희생에 감동한다.

비누는 세상에 만연한 악과 싸우는 투사가 아니라 세상의 물리법칙에 순응하는 침묵의 일꾼이다. 비누는 고집이 세고 과묵하다. 비누는 내면이 성긴 촉법소년처럼 작은 악에 물들지 않는다. 비누는 잊힐 뿐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 이것은 주(週)와 달(月) 사이에서 닳다가 우리들 곁에서 사라진다. 한 점 기쁨이나 보람도 탐하지 않은 채 자기 소멸의 운명으로 뛰어드는 비누라니! 우리 뇌는 망각에 길든 탓에 비누가 보여주는 인내와 신중함 따위는 쉽게 잊는다. 비누가 물에 녹아 사라지면 금세 다른 비누가 온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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