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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이 무너지는 시대… 거장 4인이 일깨우는 휴머니즘

입력 : 2022-11-24 21:00:00 수정 : 2022-11-25 13: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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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남재, 서용선·신학철·오원배·정현 4인전 ‘기억의 장면들’

근대미술 2세대 대표 작가들 한곳에
역사화 장르 개척 서용선 ‘사람들’부터
신학철 최초 공개 1973년작 ‘비상탈출’
코로나 시대상 담은 오원배의 신작들
정현의 조각·판화 등 입체 작품까지
시대와 함께 호흡해온 명작들로 꾸려

“인간 형상 다룬 작품들 살펴볼 계기”

전쟁이 터졌을 때만 인간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극한의 폭압 속에서만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더 바랄 게 없는 풍요와 배부름 속에서도 야금야금 갉아 먹힌 인간성이 무너진다. 방심한 사이, 인간 사회는 짐승의 왕국이 된다. 방치된 사회의 병리현상들은 곪아 손 쓸 틈도 없이 권력을 접수한다. 수백명이 보도 위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도 하고, 가해자들의 악다구니가 더 크게 울려 세상을 압도하기도 한다. 그런 역사의 고비마다 예술가들의 작품은 죽비소리가 됐다. 이것이 인간의 행위냐 묻고, 이곳에 인간성이 있느냐고 따졌다. 그런 예술은 법정의 합리와 세상의 시시비비를 넘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 가장 뿌리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서용선(71), 신학철(79), 오원배(69), 정현(66). 근대미술 2세대를 대표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물음을 던져온 작가들이다.

정현, 신학철, 서용선, 오원배 작가(왼쪽부터)가 전시장에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예진 기자

이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4인전을 열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두남재아트센터 ‘기억의 장면들(Scenes of memory)’이다. 미술계에서 “이 넷을 한곳에 모은 것도 대단하다”는 말이 나오는 전시다. 

 

전시는 4인이 평생 일군 화업 중 인간성과 휴머니즘을 촉구하며 시대와 호흡한 명작을 모아 꾸려졌다. 두남재아트센터와 공동 기획자 자격으로 전시를 준비한 김기라 작가는 “네 분 선생의 작품 중 제일 좋은 것을 고르고 골랐다”고 말했다.

서용선 ‘헤겔동상’(2012-2015).

우리나라에서 ‘역사화’, ‘역사풍경화’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독보적 작업 세계를 일군 서용선의 작품은 1984년작 ‘사람들’부터 2017년 근작 종이에 그린 아크릴화 작품까지 시대별 대표작 13점이 나왔다. ‘헤겔동상’(2012-2015), ‘기총소사’(2004), ‘부역’(2004) 등, 시대적 아픔이 작가의 손끝을 통해 나와 묵직한 감동으로 유명한 작품들이다. ‘젊은 죽음들’(1997)과 ‘청령포, 절망’(1995-1996)은 최근의 비극적 참사가 연상되는 형상이어서, 아직 충격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마치 오늘 쓴 일기처럼 생생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청령포, 절망’은 청령포 물가에 갔다가 그곳에 빠져 죽임을 당한 조선시대 단종 이야기를 듣고 “환각처럼 물에 빠진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는 작가가 그린 작품이다. ‘젊은 죽음들’은 1990년대, 강원도에서 간첩을 ‘소탕’한 뒤 사살해 발가벗긴 시신 사진이 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서 작가는 “아무리 ‘북괴’라 하더라도 이념을 떠난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는가 싶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신학철 ‘비상탈출’(1973).

한국 민중미술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한 명인 신학철의 11점 가운데에선 대표작인 포토몽타주 작품들,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1988)가 나왔다. 그러나 명성 높은 대표작을 제치고 이번 전시에서 놓쳐선 안 될 작품은 ‘비상탈출’ 시리즈다. 1973년에 그려진 이 그림 석 점은 작가를 겸하고 있는 눈 밝은 기획자들이 신학철의 작업실에서 보물찾기하듯 발굴한 최초 공개 작품이다. 무려 49년 동안 작가가 한 번도 내놓지 않고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전위 미술그룹인 ‘AG(아방가르드)’ 소속이었던 신학철이 설치 작품으로 대외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 그림에서 손을 놓지 않고 그려 간직해왔다.

 

그린 이유와, 공개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처음에는 “당대에는 왠지 부족해 보여서”라거나 “설치를 하면서도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이렇게 조그맣게 손 운동을 했었지”라며 웃어넘기려 했다. 겸손한 회피에도 관심 섞인 추궁이 이어지자, 신학철은 추가로 기억을 더듬어 “아방가르드 활동을 하면서 발상하고 제작하고 전시가 끝나면 사라져버리니 내 머릿속에 남는 게 없어 뭔가 허전했다. 아방가르드 전시 때 닭통을 만들고 닭을 넣어 유신의 캄캄함을 표현한 작품이 있었는데, 그런 갇혀 있는 느낌하고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원배 ‘무제’(2022).

오원배는 시대 상황에 대한 예민한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 소외를 작품에 풀어내온 작가다.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한 대형 신작을 전시장 초입에 걸어 네 작가의 촉수가 여전히 예민하게 건재함을 대변하려는 듯하다. 신작 ‘무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스크를 쓰고 온몸을 감춘 듯한 한 사람이 새장에서 사라진 파랑새를 애타게 부르는 풍경이 표현됐다. 바이러스를 무기로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와 강제된 제약 속의 인간, ‘뉴노멀’이라는 새로운 표준 속에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의 모습이 다양한 은유를 가진 사물들과 함께 캔버스에 담겼다.

 

오 작가는 “최근 2∼3년 생존을 위해 우리가 강제로 경험한 것들을 생각했다. 거리두기와 격리, 한편으론 또 디지털과 인공지능이란 신기술을 적극 활용해야 했던 시대였다. 기존 절대적 가치에는 회의가 일어났고, 비대면은 코로나와 무관하게 이제 생활 속에 받아들인 표준이 됐다. 이 모든 변화는 서서히 준비해서 겪은 것이 아니기에 적응이 힘들어 소외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런 새로움을 걱정하기도, 한편으론 기대하기도 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의식해서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 ‘무제’(1988). 두남재아트센터 제공

세 작가의 평면작품들을 이어주듯 전시장 한가운데에 놓인 입체 작품들은 ‘침목’ 시리즈로 유명한 조각가 정현의 작품들이다. 전시장에는 1989년 석고 조각 작품과 1980∼90년대 콜타르 드로잉, 2010년대 판화가 고루 나왔다. 정 작가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특이한 소재를 통해 매우 강렬한 화두를 던졌던 예술가다. 철로에 깔려 십수년 기차의 하중을 견디고 난 뒤 버려지는 침목이나, 석탄을 만들고 남아 버려지는 찌꺼기인 콜타르 등 그가 재료로 삼은 것들은 쓸모가 다했다고 여겨진 것, 무언가 만들고 남은 부산물이었다. 조각에선 더더욱 쓰이지 않았던 재료다. 정 작가는 “시대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들이지만, 그 속에도 존재의 힘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드러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두남재아트센터는 2020년 개관 이후 꾸준히 한국 미술을 시대별, 세대별로 나눠 기획전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되짚어보고 세대 간 이해, 시대흐름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는 담론을 만들기 위해서다. 기획자들은 자본의 중심인 서울 강남 한복판 상업화랑에서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 담론을 제시하면서 수집가들을 만나보겠다는 포부에 차 있다. 이런 기획자들의 스승이자 선배이기도 한 네 작가가 제자를 도와 취지를 부연하기도 했다.

 

정 작가는 “우리의 미술을 단순히 근시안적으로 보기보다 큰 흐름으로 보면서, 단색화로 대표된 시장의 대표 상품 다음에 올라올 미술은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분석해 끌어올리고 이유를 제시해보려는 시도”라며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서 작가는 인간 실존 또는 인간 형상을 내세운 작품들의 역사를 살펴볼 계기가 돼야 한다는 바람도 밝혔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건 1970년대 국전에서 좌상을 선보인 것 빼놓고는, 몇몇 작가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1980년대 인간을 다룬 것도 사회나, 정권에 대한 반발이란 주제의식에서 비롯된 정도다. 세계 미술사 맥락에서 신구상의 경향과는 어떤 연관성을 가졌는지, 한국 현대미술에서 인간을 다룬 작품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등을 따져볼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12월 20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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