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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학생과 시민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 낸 혁명이다. 4월19일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청소년과 도시 빈민 등이 대거 가담해 진압 경찰과 충돌했다. 이날 처음으로 ‘민주주의’가 구호로 등장했고, 1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했다. 4월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과 시위에서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를 외쳤고 이튿날 이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내고 하야했다. 이어 야당인 민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주도하고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권력을 장악했다. 민주당 정권은 민주주의를 제2공화국의 주제로 삼았다.

4·19는 미완의 혁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사회는 총체적인 지도력 부족으로 혁명 후 과업을 잇지 못했다. 혁명의 중심이던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갔고 혁명의 결과도 흐지부지됐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 혁명은 한국전쟁 이후 국가에 대항한 시민사회 최초의 직접적 도전이었으며 시민사회의 첫 번째 승리”라며 “억압적 국가기구를 해체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한된 승리를 거두었을 뿐”(‘한국민주주의의 이론’)이라고 평가했다. 최정운 서울대 교수는 “4·19가 초래한 국가는 너무나 무능하고 허약했다. 따라서 아무런 변혁도, ‘바꿈’도 이루지 못했다”(‘한국인의 발견’)고 했다.

하지만 그 정신은 많은 이에게 시민의식과 민주주의를 키워 나가는 동력으로 남겨졌다. 시인 김수영은 4·19혁명 직후에 발표한 산문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에서 “나는 이번 싸움(抗拒·항거)이 우리의 싸움의 서막의 서곡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앞으로 건설할 빛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구상하여 볼 때, 염두에 들어오는 무수한 고생다운 고생의 첫머리인 것 같다”고 했다. 시 ‘푸른 하늘을’에서는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이라고 읊었다.

오늘이 4·19혁명 62주년이다.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돼 있다. 4·19 정신과 험난한 민주화 여정을 되새겨야 할 때다.


박완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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