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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격차·불평등 고착화 시키는 ‘자산장벽’

입력 : 2021-07-10 03:00:00 수정 : 2021-07-09 21: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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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임금소득 등으로 결정되던 계급
이제는 자산의 보유 정도에 따라 결정
교육에 대한 투자, 예전같은 수익 못내
자녀에 증여·양도 통해 자산 대물림
한번 벌어진 富의 격차 뒤집기 어려워
가이 라이더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이 지난달 7일 제109회 연례회의 개막 연설을 하고 있다. 라이더 총장은 “코로나19 여파로 노동계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4배 더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면서 “국가들 간 백신 보급에서의 총체적인 불평등과 재정적 불평등으로 인해 직업 세계에서는 더 큰 불평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ILO 제공

이 모든 것은 자산에서 시작되었다/리사 앳킨스·멀린다 쿠퍼·마르티즌 코닝스/김현정 옮김/사이/1만4500원

 

‘자산 불평등 시대.’

불평등은 이 시대 가장 큰 화두 가운데 하나다. 문재인 정권 역시 집권 당시부터 불평등 완화를 기조로 세웠지만, 벌어지는 계층 간 자산 격차는 좁히지 못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총자산 기준으로 상위 10%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41.10%에서 매년 꾸준히 증가해 2020년에는 42.54%까지 커졌다.

우리 국민의 대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부동산을 겨냥한 정부 정책이 실패로 귀결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신한은행이 최근 발표한 ‘보통사람 금융생활 보고서 2021’에 따르면 전국 성인 1만명을 조사한 결과 상위 20%와 하위 20%의 부동산 자산 격차는 2018년 125.4배에서 2020년 164.3배로 급격히 벌어졌다. 부동산 정책을 손보겠다는 정부의 야심 찬 계획은 국민적 공분을 사며 무산된 모양새지만, 자산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부동산 시장을 이대로 놔둘 수 없는 이유다.

벌어진 자산 격차는 뒤집기 어렵고 대물림되기는 쉽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1~5월 서울 아파트 거래 중 증여가 차지하는 비율은 12.94%로 집계됐다. 전체 5만2281건 중 6767건에 달하는 수치다. 앞서 2017년 해당 비율이 4.45%였던 것과 비교하면 약 3배 늘었다. 특히 올해 3월에는 전체 거래 4건 중 1건(24.2%)이 증여로 나타났다. 아파트값이 지속 상승할 분위기를 보이자 20·30대가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다), ‘빚투’(빚을 내서 투자한다)로 부동산 매입에 나서고 있는 것도 사회적 이슈다.

리사 앳킨스·멀린다 쿠퍼·마르티즌 코닝스/김현정 옮김/사이/1만4500원

이렇게 세워진 ‘자산 장벽’은 계층을 나누고 불평등을 고착시킨다. 책 ‘이 모든 것은 자산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저자들은 ‘자산의 소유 여부’가 고용과 직업적 지위, 임금소득을 대신해 현재 ‘계급’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산이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불평등의 원천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책은 자산 보유 정도에 따라 시민들을 새로운 다섯 가지 계급으로 분류했다. 계급은 ‘투자자’, ‘주택 담보 대출이 없는 주택 소유주’, ‘주택 담보 대출이 있는 주택 소유주’, ‘임차인’, ‘노숙자’ 순이다. 이전까지 노동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해 내는 능력, 고용 여부, 직업적 지위, 임금소득 등에 따라 노동자 계급, 중산층, 상류층 혹은 블루칼라, 화이트칼라 등으로 나누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구분이다.

부동산(주택)은 개인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자산이자 가장 큰 불평등을 초래하는 요인이라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주택 가격의 급격한 상승과 저금리, 투자소득에 대한 세금 혜택, 임금 정체 등으로 자산화된 주택에 대한 접근성이 일부 계급에만 집중되면서 주택 자체가 자산 불평등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곧 ‘평생 임차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증가하는 반면, ‘평생 주택 소유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대 비율은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임차인에서 주택 소유주로 넘어가는 사다리가 끊어진 것이다.

자산 보유 여부는 이제 우리 삶 자체의 방향을 바꿀 만큼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다. 자산으로 계급이 나뉘고, 교육에 대한 투자가 더 이상 예전 같은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점차 투기적이고 자산 가치 상승 논리에 따라 결정되는 ‘자산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관리하고, 계획한다. 모두가 강제로 ‘자산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임금과 자산의 역전 현상의 원인은 1980∼90년대를 강타한 신자유주의 이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금융 정책과 조세 정책, 공공 지출 제한 정책 등이 맞물리면서 자산 인플레이션과 임금 정체라는 새로운 조합을 탄생시켰다. 각국 정부는 값싼 신용을 활용해 자산에 투자하면 정체되고 있는 임금소득을 상쇄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그 결과 자산 수익률이 노동 수익률을 뛰어넘는 현상이 지속하게 됐다.

자산 가치가 상승했다는 사실은 자산 시장에 진입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늘었다는 의미다. 자산 중심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서 소득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의 지위는 점차 하락한다. 그러자 부모의 증여와 양도는 자녀의 위치를 결정짓는 전략적 결정이 됐다.

특히 지금 20·30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좌절감이 더하다. 임금소득만으로는 부를 축적하고 중산층의 삶에 접근할 수 없게 된 첫 번째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속적인 주택 가격 상승, 임금 정체, 임시 고용 방식 때문에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부의 핵심적인 원천인 ‘주택’을 소유하기 어렵게 됐다. 자산 가치 상승에 따른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면 상대적으로 더욱 심한 경제적 빈곤을 겪게 된다. 자산 구축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학자금 대출 등 과거에 생겨난 돌이킬 수 없는 부채와 매몰 투자에 발목이 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나갈 기회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온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사람들 사이에서 영구적이고 피하기 힘든 위기감이 드러나고 있다. 서구에서는 이를 두고 ‘미래의 불발(the abortion of the future)’, ‘더디게 무효화되는 미래(slow cancellation of the future)’, ‘더딘 죽음(slow death)’ 등 자조 섞인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인생이 일련의 ‘처절한 생존의 순간’이 돼버렸으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채무에 따라 결과가 정해지는 게임에 강제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는 뜻이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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