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극단주의·인종주의에 대해서도 경각심

“우리 육군에 성적 괴롭힘과 성폭력이 있을 자리는 없습니다(There is no place in our Army for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
미국 창군 이래 여성으로는 처음 육군을 이끌게 된 크리스틴 워머스 제25대 육군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미 육군에서 성적 괴롭힘과 성폭력의 추방을 강조했다. 마침 한국도 성추행 피해를 입은 20대 여성 공군 부사관의 극단적 선택이 큰 충격을 안긴 터라 여성 장관을 맞이한 미 육군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주목된다.
5일 미 육군에 따르면 워머스 장관은 최근 육군 전 장병에게 취임 후 첫 지휘서신을 보냈다. 그는 장병들한테 “우리의 대비 태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대비 태세를 좀먹는 해로운 행위들부터 없애야 한다”며 “우리 육군에 성적 괴롭힘이나 성폭행, 가정폭력, 극단주의, 인종주의가 있을 자리는 없다”고 선언했다.
대비 태세를 좀먹는 여러 유형의 해로운 행위들 중에서 가장 먼저 성적 괴롭힘과 성폭력을 꼽은 것이다. 이는 본인이 여성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미 육군에서 벌어진 바네사 기옌(여) 상병 피살사건을 계기로 군대 내 성폭력 근절 및 양성평등 문화 정착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진 점을 감안한 결과이기도 하다.
텍사스주(州) 포트후드 육군 기지에서 일병으로 복무하던 바네사 기옌은 지난해 4월 22일 갑자기 실종됐다. 수사 과정에서 그가 얼마 전 “상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주변에 도움을 호소하려 한 정황이 포착됐다. 기옌은 실종 8일 만인 4월 30일 부대 밖에서 심하게 훼손된 시신으로 발견됐다. 헌병은 그의 상관이던 에릭 로빈슨 상병을 성폭행 및 살인 혐의 용의자로 지목하고 추격에 나섰다. 총기를 들고 탈영한 로빈슨은 포위망이 좁혀오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 육군은 충격에 휩싸였다. 민간인이 포함된 독립적 위원회가 감찰을 벌인 끝에 장성을 포함한 부대 간부 14명이 정직 등 중징계에 처해졌다. 기옌은 일병에서 상병으로의 1계급 특진이 추서됐다. 하지만 기옌 유가족은 국방부와 육군의 조치가 미흡하다며 반발했고,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직접 유족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부조리 시정을 약속했다. 군대는 물론 미국 사회 전역에서 기옌을 추모하는 물결이 일었다.
마침 우리나라도 공군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 여파가 날로 확산하고 있다. 20대 중사 이모(여)씨가 상관한테 성폭행을 당한 뒤 가해자 처벌 등 적절한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자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피해 부사관은 경남 진주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군인이었다.
군 기강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책임을 지고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이 물러났지만 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전 참모총장은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며 “무엇보다 고인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사퇴의 변을 밝혔다. 전문가들은 “성(性) 관련 비위를 쉬쉬하고 상부에 보고하길 꺼리는 우리 군대의 그릇된 관행이 화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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