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몇 달 전, 모 TV 프로그램 관계자로부터 ‘수궁가’의 범 내려오는 대목을 풀어달라는 의뢰를 받았는데, 교육방송도 아닌 일반 방송에서 그 대목이 왜 궁금한지 의아했다. 어느 밴드가 ‘범 내려온다’를 불러 인기몰이 중인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는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후맥락을 알아야 한다. 자라가 토끼를 ‘토 생원’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그만 “토, 토, 토, 토, 토, 호 생원 아니요?”라고 발음이 새는 바람에 토끼 대신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 생전에 ‘생원’으로 불리기는 처음이어서 신나게 내려오는 대목이 바로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의 가락이다. 생원은 본디 소과(小科)인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한 사람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이 좀 있는 선비를 높여 부르는 말로도 쓰였다. 산중의 왕이라는 호랑이가 그 ‘생원’ 소리에 신바람이 났다면, 힘없는 토끼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토끼의 평생 한은 자신이 산속 동물 누구나 만만하게 여기는 만만쟁이라는 사실이다. 호랑이나 멧돼지 같은 큰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쥐와 여우, 다람쥐 같은 작은 짐승조차 ‘토 생원’은 고사하고 ‘토끼야, 토끼야!’로 동네 애들 부르듯 하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그렇게 무시당하는 처지일수록 도리어 헛된 명예욕이 커지기도 하는 법이어서 사실과 아주 어긋나는 아부나 찬사에도 약해지는 경우가 제법 있다.

별주부는 토끼가 수궁에만 들어가면 높은 벼슬을 할 것이라 사탕발림을 한다. 그러나 토끼도 자신이 얼마나 무식하며 얼마나 왜소한지 잘 아는 터였다. 그래서 수궁에는 유식한 벼슬아치들이 많지 않은지, 덩치 큰 짐승은 없는지 넌지시 물어본다. 그러자 별주부는 거기에 가면 토끼가 제일 유식할 것이며, 장군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답을 한다. 사는 곳을 바꾼다고 일자무식에서 유식자로 바뀔 리도 없고, 집채만 한 고래가 사는 수궁에서 대장노릇이라니 어불성설이다.

제가 가진 열악한 조건은 그냥 둔 채 한탕주의의 유혹에 귀가 팔랑일 때 만만쟁이의 비애는 한층 더해지는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숨기려 자꾸 더 가난해진다더니, 만만쟁이도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 도리어 더 만만해지지나 않는지 살필 일이다. “범 내려온다”의 호기로움이 “토끼 내려온다”에서도 가능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