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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부인’ 아닌 선구적 여성화가 우향 박래현을 만나다

입력 : 2020-10-23 05:00:00 수정 : 2020-10-23 1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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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탄생 100주년:박래현’전
초기 대표작 ‘단장’ ‘이른 아침’ ‘노점’으로
김기창과 결혼 전후 이미 화단 정상에
60년대 세계여행후 ‘엽전시리즈’로 알려졌던
황톳빛 생명력 넘치는 추상화로 유명
'노점'(1956)

천재 화가의 부인. ‘청각 잃은 남편의 입과 귀가 되어 시중을’(1962년 잡지 ‘여원’의 묘사) 들었던, ‘1974년 제6회 신사임당상’에 빛나는 화려한 조명을 받은 생. 남편이 지어준 호와 이름 ‘우향(雨鄕) 박래현’이라는 이름으로 산 사람. (남편인 한국의 대표적 근대화가 운보 김기창은 1947년 결혼 후 ‘박래현(朴來賢)’을 ‘朴崍賢’이라 ‘고쳐준다’.)

 

운보의 부인으로 불려온 그를 국립현대미술관이 ‘누군가의 부인’이 아닌 ‘선구적 여성 화가 우향 박래현’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탄생 100주년:박래현, 삼중통역자’ 전시를 통해서다.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이번 전시에서 1943년부터 1976년까지 박래현이 남긴 회화와 판화, 태피스트리(손이나 기계로 짠 직물) 작품 138점과 아카이브 자료 71점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김기창의 부인이기 이전에 20세기 한국 화단의 정상에 선 여성 화가였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 중 스물셋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총독상)을 받았고(‘단장’), 해방 후 1956년 대한미협전과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모두 대통령상을 휩쓸었다.(‘이른 아침’, ‘노점’) 그렇게 그는 관전에서 최고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다.

'단장'(1943)

전시는 이 사실을 강렬하게 주지시키며 시작된다.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것은 오랫동안 개인이 소장하며 공개되지 않아 원화 실물을 본 사람도 거의 없다는 ‘단장’(화장). 왜색 논란이나 역사의식 평가를 뒤로 하고, 이번 전시에서 ‘단장’은 박래현이 당대 최고 기예를 가진 화가였음을 입증하는 근거 중 하나일 뿐이다. 이어 심드렁한 얼굴로 앉아 있는 여인, 아이를 끌고 가며 태연한 여인 등 한국 장터의 풍경을 그린 ‘노점’은 소재와 특유의 큐비즘적 형태가 더할 나위 없는 조화를 이룬다. 입체파의 밑그림이 피카소의 유화보다 더 잘 어울리는 수묵담채화가 있다는 사실로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끊임없이 확장된 작품 세계

 

또한 전시는 박래현이 남긴 작품들에 존재하는 곡해, 추측의 와전을 바로잡는 데 힘을 기울인다. 아픈 시대에 만들어진 강퍅한 프레임을 벗기고 박래현의 예술 자체에 집중한다. 전시의 안내대로 그림을 새로이 들여다보면 박래현은 오직 직진 또 직진했으며, 그 목적지는 시각의 확장, 기법의 혁신, 새로운 국제 경향을 한국화로 도입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 사례가 오랫동안 일명 ‘엽전 시리즈’로 불려온 1960년대의 추상화 연작(‘작품’, ‘영광’ 등)이다.

 

박래현은 당시 첫 해외여행으로 대만, 홍콩 등을 돌고, 이어 미국과 중남미를 돈 뒤, 이국적 풍경과 문화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특히 미국 박물관에서 접한 원시 문화에 강력한 영감을 받아 황톳빛으로 생명력이 넘치면서도, 동양의 한지에 먹의 진동하는 듯한 번짐이 가진 미학이 절정을 이루는 추상화를 내놓는다. 서구에서 불어오는 추상화의 물결을 동양화의 토대 위에서 어떻게 수용해낼 것인가를 고민해온 결과물이기도 했다.

 

김기창과의 부부전에서 이 파격적인 작품들을 공개한 뒤 파장이 일자, 기자가 김기창을 찾아와 필담을 나눴다. ‘이 작품의 정체가 뭡니까’ 물음에 “엽전을 참조했을 것”이라는 남편의 해석이자 의견이었던 대답이 정답으로 굳어져버렸다. 전위적 추상에 구상의 냄새를 뿌리고, 1960년대 민족주의적 열망에 부응하려 토속적 소재를 끌어들인 셈이 됐다.

 

김예진 학예연구사는 “추상화가 낯선 그 시대 관중들에게 ‘이 그림도 우리와 가까운 것’이라고 일종의 ‘다리’를 놓아주려 한 것이었으나, 너무 협소했고 실제 작가가 표현하려 한 것도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작품'(1960년대 후반)

이에 전시는 필담 1년 후인 1967년 작품의 당사자인 박래현이 직접 남긴 글에 집중한다. “태양의 생활력을 등황(黃)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생명을 고대주(古代朱)의 피로, 그러나 타산을 벗어날 수 없는 시대의 신중성을 흑(黑)빛의 침묵으로, 3색의 하모니는 하나의 언어로 백지 위에 나를 대변해 주었다”라는.

 

엽전 시리즈로 불린 그림 뒤에는, 세계로 눈을 돌리고 추상화의 물결을 확인한 뒤, 황금빛 고대 유물의 찬란함을 재해석해 구불거리는 황색 띠로 가득찬 추상화를 탄생시킨 박래현이 있다.

 

◆현모양처와 이데올로기와 싸우고 순응하고

 

실험적으로 전진한 작품들과 달리, 여성으로서의 그의 삶은 끊임없이 구부러졌다. 그는 유학파 출신의 실력있고 당찬 신여성이었으나 투사의 길을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범적인’ 부인으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모델이자 확성기가 되기도 했다. 자신 앞으로 온 청탁글 ‘남편 시중기’ 앞에서 고민 끝에 펜을 들고 “남편의 시중을 잘 들 수 있다는 것은 현처로서의 제 일 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현처는 커녕 현처 근방에서 서성댈 수 있는 자격조차 없다”고 자신을 낮추기까지 한다.

 

전시장에 마련된 박래현의 수필을 읽다보면, 그는 여성으로서의 삶 앞에 매일 좌고우면했음이 느껴진다. 그는 타협하고 순응하면서도, 대신 그에 따른 번민을 기록했다.

 

지금까지의 우리 여성들의 생활이 너무나 종속적이었다는 것은 두말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 여성들은 남편을 위하여 아침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그 치닥거리에 중요한 시간을 다 허비하고 그것이 여성의 제일의 본업인 것처럼 이것을 완전히 한 사람만이 훌륭한 여성인 것처럼 수백년을 실행하고 지도해 왔으니 우리의 어머님들은 참으로 훌륭하고도 한편 어리석었다

 

창살에 어둠이 어둑어둑 버서지기 전에 옷을 입으면 밤 열시가 지나야 비로소 옷을 벗고 쉴 수 있는 우리 조선 여성의 생활… 오히려 남성들보담도 피곤하리라. 여성은 하루종일 조곰조곰 싸인 일에 끝없는 시간을 지내고 정신적으로나 자신을 위안하고 교양을 돋우어주는 시간은 좀처럼 찾기가 어려웁다. 나는 학교시대 여성들 중에 훌륭한 예술가가 왜 적으며 어찌 결혼 후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까 각끔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의문은 결혼한지 일년만에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과 가정생활! 이것은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계이다, 아침 6시쯤 일어나 기저구 빨기, 밥짓기, 청소하기, 조반이 끝나면 이것 저것 치우고 닭의 치닥거리, 애기 보기, 점심이면 밥을 먹고 손이 오면 몇시간 허비하고 저녁먹고 곤해서 좀 쉬는 동안에 잠이 들면, 자 그러면 본업인 그림은 언제 그리나…이 분주한 가정 속에서 여성들이 예술을 하고 철학을 하고 의사가 되고 실업가가 되어 자기가 희망하고 있는 자기의 생활을 그대로 계속해 나갈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는 “남성들의 가사 노동, 여성들에게 불리한 법 개정, 남성의 봉건적의식을 개선하는 교육을 제안하고 싶다”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현실의 박래현은 자신의 작품을 두고 자신의 눈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남편이 기자와 필담을 나누는 동안, 그저 침묵한다. 그는 다소 빗나간 엽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 앞에서도 왜 입을 다물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생전에 그를 잘 알았다는 이들은 증언한다. “박래현은 남편을 앞세우고 자신은 나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다른 기록도 추측에 도움이 된다. 박래현은 ‘아버지가 소리를 못 듣는다, 이상하다’하는 자녀의 말을 듣고 상처입을 자녀를 염려해 김기창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최고의 화가가 되어야 해요.” 

 

수필에서 드러나는 그의 감수성 역시, 저돌적이고 근성있는 작품 세계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1958년 잡지 ‘자유세계’에 실은 글에서 말한다.

 

거듭 서너해, 이 무렵이 되면 남쪽 창 안에 영산홍이 하나 둘 빨갛게 피어 이른 봄을 알려 준다. 마를 대로 말라버린 가지가 가엽게만 보이는 지루한 겨울이 다 가고, 창문 사이사이로 봄의 입김이 살며시 스며들면 백록빛 새싹이 뾰죽뾰죽 돋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또 그 해를 안심한다. 영산홍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박래현에 대한 ‘진짜 해석’은 이제 시작이다. 그가 남긴 그림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내년1월3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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