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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칼럼] “망조 든 나라”의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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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2-03 23:26:49 수정 : 2020-02-03 23: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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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비리 감추는 ‘검찰 인사 학살’ / ‘살아 있는 권력’ 수사 좌절은 / ‘만인 법 앞 평등’ 정신 무너뜨리고 / ‘암흑의 역사’ 만드는 출발점 될 것

‘행복어사전’. 천재작가 이병주의 소설이다. 1970년대 말 5년에 걸쳐 썼다. 이런 글이 나온다.

“이조의 망조는 ‘그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당쟁은 논리 이전의 문제로 전개되고, 반역자에 대한 보복이 삼족을 멸하고… 그런 정치 풍토에서 어떻게 활달한 인간관계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강호원 논설위원

이조는 조선이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다. 민족적 관점이 아니라 ‘이씨의 지배’로 격하하는 식민사관 명칭이라는 생각에서다. 그 사건이란 사육신 사건을 말한다. 수양대군은 문치 시대를 연 세종·문종 때의 대신들을 참혹히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 항거하는 사육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도덕의 나라’? 민망한 말이다. 도의와 법도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다.

“신숙주는 성삼문과 결코 동열에 놓을 수 없다.”

왜? 절개를 지킨 성삼문, 부도덕한 패도 세력에 붙은 신숙주. 이유는 자명하다. 그때 가치로 따지면 더욱 그렇다.

옳고 그름의 잣대는 사라지고, ‘권력만 잡으면 그만’이라는 뻔뻔한 생각에 조선은 오염됐다. 그 결과는? 그때 생긴 훈구파와 사림파.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뿌리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백성이 아무리 참담한 변을 당해도 당파 이익만 따졌다. 부패한 관료들. 뇌물을 먹어도 자신의 당파라면 형틀에 세우는 법이 없다. 그런 나라의 운명은? 보나마나다. 조선이 왜란·호란 이후에도 실낱같은 명맥을 이은 것은 침략하는 주변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글이 눈길을 끈 것은 지금 상황과 빼닮았기 때문이다.

검찰은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을 두고 13명을 재판에 넘겼다. 한병도·백원우·박형철 등 청와대 관계자 5명도 포함됐다. ‘조국 일가’ 비리·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에 이은 권력형 대형 불법사건이다. 기소 결정 과정에서 역사에 남을 진풍경이 벌어졌다. 검찰 간부회의에서 추미애 법무장관의 ‘인사 학살’ 때 임명된 공공수사부장은 기소 의견을 냈다. 불법이 저질러졌다고 판단한 것. 대통령과 가까운 서울중앙지검장만 반대했다.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하는 검찰 조직은 공중분해될 판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손발을 자르는 ‘인사 학살’. 결국 어제 서울중앙지검의 1∼4차장이 모두 교체됐다. 수사 실무책임자인 부장급 검사 상당수도 바뀌었다. 청와대는 법원이 발급한 압수수색 영장에도 응하질 않는다. 이제는 청와대 비서관까지 검찰을 정치검찰로 몰아세운다. 조국 일가 비리에 연루된 피의자인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기소 쿠데타”라며 “검찰총장과 검사들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검찰 조사를 받은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검찰권 남용”, “수사가 아니라 정치에 가깝다”고 했다.

대통령과 법무장관은 “검찰개혁”을 외친다. 누가 누구를 개혁한다는 것일까. 검찰을 개혁하지 않아 범죄 피의자 딱지가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줄줄이 붙었는가. 검찰개혁을 외치는 인사 상당수는 조사받아야 할 사람이다.

물을 일은 꼬리를 문다. 취임 3년이 지나도록 임명하지 않은 청와대 특별감찰관. 대통령 친인척과 주변인을 감시하는 자리다. 그마저 이제 폐지한다고 한다. 왜 임명하지 않았을까. 대통령은 참모와 주변인들을 모두 청백리로 여긴 걸까. 민정수석실이 있다고? 민정수석이던 조국씨가 비리 혐의 당사자다.

오죽하면 진보 인사조차 이런 말을 했다. “진짜 대통령은 뭘 하고 계시나요.”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법의 정신이다. 검찰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다는 이유로, 법과 규정을 고칠 수 있다는 이유로 불법비리를 저질러도 죄를 묻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역사를 퇴보시키는 ‘반민주’ 행위다.

도의와 법도를 헌신짝처럼 팽개친 조선. 패망 때까지 당쟁과 모략, 부패만 들끓었다. 권력자를 위해서라면 법의 정신을 짓밟아서라도 불법비리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어떤 역사를 만들까. ‘그 사건’처럼 ‘망조 든 역사’를 낳지 않을까. 국민은 그런 사실을 모를까.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강호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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