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에서 1987년 출간된 소설이 뒤늦게 프랑스에서 페미나상(2003년)을 받았고, 작가 사후 뉴욕타임스에서는 ‘올해 최고의 책’(2015)으로 뽑았다.
에메렌츠의 아버지는 그녀가 세 살 때 죽었다. 어머니 홀로 농장을 건사하다가 새아버지를 만났는데, 그이도 전쟁에 징발됐다가 전사했다. 어머니에게 혼이 난 어느 날 쌍둥이 동생을 데리고 가출했다가 폭우 속에서 쌍둥이 동생들이 번개에 맞아 죽는다. 겹치는 극도의 불행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우물에 몸을 던졌고, 에메렌츠는 부다페스트로 나와 열세 살 때부터 남의 집 하녀로 살아왔다.
그녀는 작가인 ‘나’의 집에 일을 도우러 다니다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공동주택 관리인으로 살면서 동네의 온갖 허드렛일도 도맡았다. 그녀는 “사랑이란 의무이고, 정말 위험하며, 이런 위험을 동반한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 같이 실제로 조건 없이, 거의 병적으로” 나를 아꼈다. 그녀는 성경을 읽지는 않았지만 성경의 핵심을 실천했다. 조건 없이, 아낌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랑을 품고 있는 이가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절친 폴레트의 자살을 방조하고 심지어 도와주기까지 한다. 그녀는 절친의 묘석에 “여기, 이제 고독은 없으니 평화롭게 잠드소서”라는 작별인사를 남겼다. 에메렌츠는 말한다.
“누군가에게서 모래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그것을 저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죽어가는 그에게 당신은 삶을 대신할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으니까요. 내가 폴레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그녀가 삶이 지겨워 떠나고자 했을 때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죽일 수도 있어야 해요.”
책이 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문자를 측량 단위로 삼는 ‘나’에 비해 그녀는 ‘일’과 ‘실천’이 그 기준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의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수행하지 않고 타인이 그 일을 대신하는 그 모든 사람들이 인텔리겐치아였다. “에메렌츠의 세상에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슬로건을 내걸든, 어떤 깃발 아래에서 국경일 행사를 하든 그들은 모두 똑같았다.” 정치인들의 행위를 불신했고 신문을 읽지 않고 뉴스도 듣지 않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양이 개들을 거두었고 동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음식을 챙겼다.
한마디로 그녀는 용감했고 매혹적이며 악할 정도로 영리했고,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뻔뻔했다. 그녀와 마찰도 여러 번 있었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이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란, “비논리적이고, 운명적으로 뒤엉켜 있으며, 예측불가능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녀 에메렌츠를 사실상 ‘나’가 죽인 셈이다. 누구에게도 정작 자신의 집 문을 개방하지 않았던 그녀, ‘나’에게만은 마지막 문을 열어주었지만 배신당했던 그녀였다. 나는 그녀를 살리고자 했지만 죽였고, 그녀는 절친의 자살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자신만의 죽음으로 완성하려던 삶을 망친 셈이다. “죽음, 사랑, 애정이 맞잡힌 손과 그 손에 쥐고 있던 번득이는 도끼”가 아프다.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조건적이고 강건한 사랑의 표상을, 모르는 신 앞에서도 당당한 그 행위를,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자키스가 만든 ‘조르바’라는 남성과 비견되는 여성 캐릭터로 창출해냈다. 그 ‘여성 조르바’를 잃고 우는 ‘나’에게 또 다른 미래의 에메렌츠가 조언을 한다. “당신이 에메렌츠를 애달파할 순 없어요. 망자는 항상 승자예요. 패배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것일 뿐이고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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