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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에 묻혀버린 공동묘지… 묘비 없는 무덤도 3666기 [잊힌 자들의 머나먼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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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9 06:30:00 수정 : 2019-09-19 15:5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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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15만명 끌려간 사할린 가보니 / 머위, 일제가 준 ‘눈물의 끼니’ / 엄청난 번식력으로 섬 전체 뒤덮어 / 날마다 12시간 중노동 시달린 뒤엔 / 머위 절반 이상 섞인 밥에 허기 달래 / 광복, 끝이 아닌 새로운 시련 / 日, 패전 후 자국민만 배로 실어날라 / 남겨진 조선인 국적 잃은 채 버려져 / ‘망향의 언덕’엔 고국 못 간 설움 남아 / 현지 유해 봉환율 5%에 불과 / 한인묘 1395기 강제동원 피해 인정 / 2013년부터 6년간 71위 국내 봉환 / 유족 사망·고령화로 관심 줄어들어
사할린 남쪽 항구도시인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에서 바라본 도시 전경.

머위를 먹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진한 국방색 군복을 입은 ‘점령군’을 연상하게 한다.

지난 7월 찾아간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내 공동묘지는 사람 키만 한 지름 1.5m가 넘는 ‘거대 머위잎’들에 잠식당했다. 엉겅퀴와 억새, 달맞이꽃 등 온갖 풀들이 허리 높이까지 자랐고, 그중 머위는 어린아이 팔뚝만 한 줄기가 얽혀 있어 앞길을 막았다. “머위가 아니라 묘목”이라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낫을 들어 머위를 연신 쳐냈지만 끝이 없었다. 우리 정부의 7차 유해봉환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올해 국내로 들여올 예정이었던 장오준(1905∼1976)씨의 묘는 머위 숲에 가려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그늘지고 습한 환경에 머위 잎을 지붕 삼던 수만 마리의 모기 떼가 몰렸다.

일본이 사할린 점령 당시 본토에서 들여온 머위는 엄청난 번식력으로 이제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나물 반찬이 됐다. 일제강점기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15만 한인에게는 눈물의 끼니였다. 매일 12시간 중노동에 시달리고, 100여명이 한 숙소에 웅크려 자는 생활 속 식사는 머위가 절반 이상 섞인 밥이었다. 쌀밥을 한가득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 지겨웠던 머위가 광복 이후에도 남아 영면에 든 한인들의 보금자리를 포위하는 형국이었다.

장씨 묘는 약 1시간 동안 머위와의 사투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은 탄식을 자아냈다. 2011년 발견 당시 비바람에 쓸려 윗부분이 크게 손상된 형태였던 장씨의 묘비가 새 것으로 교체됐기 때문이다. 이는 사할린 현지에서 신원 미상의 유족이 묘역을 관리해 왔다는 방증이다. 국내 유족의 신청을 받아 올해 봉환할 예정이었던 장씨 유해는 7차 봉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장씨의 묘를 관리한 사할린 유족을 찾아 동의를 얻어야만 봉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현지 유족과 언제 연락이 닿을지는 가늠이 안 된다”고 했다. 사할린 33개 지역 66개 공동묘지에서 한인묘와 한인묘로 추정되는 묘(추정묘)를 더한 1만5110기 중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한 수는 1395기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6년간 국내로 들여온 한인 유해는 71위, 봉환율은 5.1%에 불과하다. 강제동원 한인의 넋을 달래는 길은 아직 한참 남았다.

사할린의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내의 역사박물관 내부. 일본식 건물인 이곳은 일제강점기 침략사와 더불어 귀향을 포기하고 사할린에서 새 가정을 꾸린 한인들의 생활 등이 기록돼 있다.

◆내달 14위 추가 봉환… 추정묘 주인 찾기 등 과제 ‘산적’

정부는 오는 10월7일 충남 천안 국립망향의동산 귀정각 앞 광장에서 올해 봉환하는 사할린 한인 유해 14위 추도·봉안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1∼6일에는 사할린 현지에서 유족과 사할린 한인회 관계자 등 50여명이 참여하는 합동추모제 및 유해 발굴 작업 등이 진행된다. 정부는 내년부터 향후 5년간 최소 55위의 유해를 추가 봉환키로 방침을 세웠다.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면 2024년까지 사할린에 강제동원된 것으로 확인된 조선인 유해 중 10분의 1이 고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유족들의 유해 봉환 신청건수가 올해 최저치를 기록해 당국은 고심에 빠졌다. 사할린 유해봉환 신청은 첫해 2016년 135건을 기록한 뒤 이듬해 120건으로 줄었다. 이후 지난해에는 134건으로 다시 증가세에 들어섰지만, 올해 97건으로 뚝 떨어졌다. 정부는 유족들의 고령화 및 사망 등으로 유해 봉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는 점을 원인으로 꼽는다. 국내 유족들의 신청서를 받아 유해 봉환을 진행하는 방식에도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씨의 경우처럼 사할린에 유족이 있거나 유족을 찾더라도 그들이 유해 봉환을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아 매년 유해 봉환 신청건수 대비 봉환율은 10% 안팎에 그친다.

난관은 더 있다. 사할린에는 묘비가 없는 한인 추정묘 3666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사할린 한인 2∼3세 모임인 한인협회는 “추정묘는 강제동원된 한인이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죽으면 이웃들이 세워준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유족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처럼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어려운 묘는 사할린 호적등록소 및 병원에서 사망증명서조차 발급할 수 없어 영영 ‘버려진 무덤’으로만 남게 될 공산이 크다. 추정묘의 가족을 찾아주는 일 역시 유해봉환 사업의 핵심 과제인 셈이다.

이에 정부는 사할린 현지의 한인 단체들과 꾸준히 네트워크를 형성해 현지 탐문을 통해 사할린 유족을 찾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더불어 국내 유족의 사망 시에도 사할린 유해와 유전자 일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사전에 ‘DNA은행’을 구축하는 방안 등을 구상 중이다. 황동준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강제동원희생자유해봉환과장은 “내년부터 국내 유족들에게 안내문을 발송해 DNA를 채취할 계획이다. 러시아 정부와도 협의가 되면 사할린 주정부에 추정묘에 대한 유전자 검사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반세기 ‘망향’ 속 박제된 ‘상흔’

‘무너진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니/ 철모르는 파도야 너를 보니 눈물 난다.’

사할린 동포 시인 허남영이 쓴 시를 노래로 만든 비가(悲歌) ‘아버지의 노래’ 중 일부다. 사할린 남쪽 항구도시 코르사코프에 위치한 ‘망향의 언덕’이 배경이다. 허 시인은 귀향을 꿈꾸다 화병으로 세상을 등진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2010년 사할린에서 영주 귀국한 성점모(89)씨가 언론에 공개한 수기 ‘망향의 반세기, 사할린 동포의 눈물 젖은 과거’의 한 대목을 들여다보면 가사에 담긴 애끊는 심정이 더욱 와 닿는다. “(코르사코프 항구에)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사할린에는 조선인이 먼저 떠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7월 ‘망향의 언덕’에 위치한 위령탑 앞에서 김종길 사할린주한인협회 노인회장이 광복 후에도 귀국선에 오르지 못한 한인들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사할린 강제동원 희생자들에게 광복은 새로운 시련을 의미했다. 패전국 일본은 전쟁 직후 귀국선을 보내 사할린에 거주하는 자국민만 실어 날랐다. ‘황국신민’을 강요받았던 사할린 동포들은 국적을 잃은 채 방치됐다. 당시 소련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들을 억류했다. 오도 가도 못 하는 처지가 됐다. 1949년 7월, 마지막 일본인들을 태우고 간 귀국선 ‘운센마루’는 코르사코프 항구를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소련 국적을 얻거나 무국적자로 남아야 했다. 망향의 언덕에서 만난 김종길 사할린주한인협회 노인회장은 “매일 술에 절어 울부짖다 언덕길에 쓰러져 얼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돌아봤다. 그는 “간혹 원양어선이 오면 트렁크에 자식과 아내를 실어 한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은 사람도 꽤 된다”고 덧붙였다. 김 회장은 1951년생이다. 그가 세살배기 때의 기억이라고 했다. 김 회장은 아직도 기억이 남아있느냐는 물음에 “못 잊는다”고 했다.

사할린 강제동원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정부 추산 15만명에 달하는 한인들은 탄광, 제지공장, 비행장·철도 건설 등에 투입됐다. 그들은 연고 하나 없는 곳에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충족하기 위해 일터를 찾아다녔다.

강제동원이 가장 극심했던 브이코프탄광은 사할린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 시내에서 65㎞ 떨어져 있었다. 차로 2시간 거리였다. 일제강점기 대규모 제지공장이 있던 돌린스크를 지나 구불구불한 비포장 도로를 30분 정도 달렸다. 그 길에는 철거 직전의 주택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한때는 한인 수만명이 모여 살았던 ‘탄광촌’이었다. 당시 한인들은 하루의 절반을 혹사당하다 만성 우울증, 각종 폐질환에 시달리는 통에 가정을 꾸리지 못해 대다수가는 독신자였다. 주택가 근처 야산에는 외롭게 살다간 이들의 공동묘역이 있었고, 그 위에 까마귀 떼가 울어댔다. 평평한 러시아인 묘와 다르게 한국식으로 불룩하게 봉분이 마련된 한인묘역 앞엔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빈 소주병이 스산한 분위기를 더했다.

곳곳에 석탄이 야적된 브이코프 탄광 내부는 벽면 나무판자 틈 사이로 자연광이 새어 들어와 겨우 주변 사물을 분간할 수 있었다. 바닥에는 두 쌍의 왕복 선로가 굴 안쪽 소실점까지 뻗어 있었다. 조선인 광부들은 탄차를 타고 막장까지 4㎞, 지하로는 500m 깊이까지 빨려 들어갔다. 그들은 탄차에 오르기 전 어둠 속 한 줌 빛을 위안 삼아 울분을 삼켰을 테다. 현지 가이드 옥사나 코토바(69)씨는 “1인당 하루 할당량은 석탄 2t, 총량은 3200t 정도였다. 배고픔을 못 이겨 도시락을 일찍 먹었다가 일본인 감독관에게 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할린=안병수 기자 r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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