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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 의존 벗어나 경제 자립… 여성, 근대화 희망이 되다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09-17 06:00:00 수정 : 2019-09-16 21: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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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박상호 감독 ‘또순이’ / 1963년 라디오극 ‘행복의 탄생’ 영화화 / 해방이후 함경도서 월남한 가족 이야기 / 자수성가 父·생활력 강한 딸 갈등 구조 / 당당한 자기주장·실천 통해 인정 받아 / 산업화 영향 지방서 서울로 인구 유입 / 사투리 쓰는 주인공에 서민 정서 부응 / 국가 차원 통합 발전 이념 충실히 구현 / ‘어용’ 평가도 있었지만 캐릭터들 ‘매력’
영화 ‘또순이’의 주인공 또순이(사진 맨 왼쪽)는 완고하고 실리적인 아버지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여성이다. 무릎은 꿇고 있으나 입을 꼭 다문 채 주먹을 쥐고 있는 모습에서 야무진 성격과 결연한 의지가 드러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행복의 탄생’의 주인공 ‘또순이’

‘또순이’라는 말이 있다. 생활력이 강하고 야무진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과거에 여성을 유형화해 부르던 관용적 별칭들이 주로 외모와 연관됐던 것과 달리, 또순이란 이름 속에는 경제적 함의가 있다. 그 함의는 여성의 주된 활동 영역이었던 가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남성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알뜰하게 집안 살림 잘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가 사회의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가정경제를 주도하는 자립적인 여성을 일컬어 또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순이란 이름이 이러한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1962∼1963년 HLKA(서울중앙방송)를 통해 방송된 ‘행복의 탄생’이란 라디오 연속극이 큰 인기를 끌면서부터였다. 이 시기는 라디오 보유 대수가 인구 100명당 5.19대로 늘어나며 라디오가 국민 미디어로 등극하고, 라디오 드라마가 경기 변동과 관계없이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그중에서도 ‘행복의 탄생’은 “부담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알기 쉬운 대사들 속에 생활 주변에 관한 풍자가 가득”한 드라마로 범국민적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 또순이 목소리를 연기했던 성우 장서일이 이 드라마로 스타가 된 것은 물론 또순이가 “장안의 라디오 가격을 올렸다”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행복의 탄생’은 1963년 ‘또순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박상호(1931∼2006) 감독의 영화 ‘또순이’는 해방 이후 함경도에서 월남해 운수업을 하는 최정대(최남현)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최정대는 “해방 후 그야말로 핫바지 바람으로 함경도 막바지에서 넘어온 사람”으로 “죽도록 일을 해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그는 돈에 대해 철저하며 남에게 의지하려는 인간을 가장 경멸한다. 또순이는 최정대의 둘째 딸로 월남할 때 등에 업혀 와 남한에서 아버지와 함께 고생하며 성장한 여성이다. “씨 안 먹은 서울 놈”한테 시집을 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생활비를 꾸러 오는 언니(이빈화)와 달리 그녀는 생활력이 강하고 장사 수완도 뛰어나다. 또 힘이나 권위에 기죽지 않으며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칠 줄 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아동복지법을 들먹이며 10여년간 식모로 일한 월급을 내놓으라고 대드는 것은 그녀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아버지 최정대는 그러한 또순이를 면전에서는 사정없이 야단치지만 속으로는 기특해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전통적인 아버지의 권위와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버지상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또순이가 경제적 문제로 아버지와 갈등하는 과정에서 독립적인 경제주체로 성장하고 나아가 어수룩한 청년 재구(이대엽)까지 자립적인 인간으로 교화해 결혼한다는 이야기다. 결국 또순이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행복까지 성취하는 것이다.

박상호 감독의 영화 ‘또순이’(1963)의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사투리로 빚어낸 범국민 화합의 드라마

이와 같이 경제 발전에 필요한 자본주의적 경제관념과 합리성이 가부장적 질서와 손잡으며 근대화 프로젝트에 복무하는 건 1960년대 초 한국영화의 주요 경향이었다. ‘또순이’에서는 그런 경향을 따르면서 지역과 세대를 아우르는 서민 계층의 화합이라는 요소가 더해진다. 앞서 말했다시피 또순이 가족은 함경도 출신 월남민이다.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 기간까지의 월남민에는 토지 개혁이나 친일파 청산과 같은 북의 개혁 시책에 반대해 남하한 사람들부터 일본의 식민지 총동원 정책에 의해 강제 이주했다가 귀향한 사람들까지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북이 고향임에도 월남한 사람의 경우에는 고향을 버릴 만큼 북의 체제에 반대했다는 것이므로 남측에서 볼 때 이념적인 신뢰도가 높았다. 함경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또순이 가족은 바로 그런 유형에 해당한다. 게다가 함경도는 북한에서도 최북단에 위치하기 때문에 남한에서 볼 때 가장 변방에 해당한다. 함경도 사투리의 생경함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부산 피란 시절 함경도 아이의 ‘무시기?’와 경상도 아이의 ‘뭐꼬?’가 소통되지 않아 “무시기 뭐꼬?”와 “뭐꼬가 무시기?”를 서로 반복했다는 유머가 있었다. 이는 6·25전쟁으로 인한 급격한 인구 이동으로 어쩔 수 없이 타지 사람들이 뒤섞인 세태와 함께 지역 간의 심리적 거리를 잘 말해 준다. 그런데 ‘또순이’에서는 그 머나먼 함경도민을 우리의 친근한 이웃으로 끌어들인다. 사투리의 생경함은 오히려 재미나고 애교 있는 말맛이 되어 웃음을 자아내고 ‘또순이’의 인기 비결이 된다.

1960년대 초반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시작되면서 지방의 인구가 서울로 유입되던 시기였다. 사투리를 통해 드러나는 또순이 가족의 변방성 혹은 지역성은 그들이 서울에서 겪었을 고생의 세월을 환기시키며 당시 서울에 모여들었던 지방 출신 서민들의 상황과 겹쳐진다. 또 그들이 서울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모습은 나름대로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했던 서민들의 희망을 반영하기도 한다. ‘또순이’가 범국민적으로 공감을 일으킨 원인은 바로 이런 점들에 있었다. 해방 때 아버지 등에 업혀 남하했다는 또순이가 10여년이 지난 후까지도 사투리를 짙게 쓴다는 다소 작위적인 설정을 하고, 당시 ‘또순이’ 이외에도 사투리를 쓰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가 연이어 제작된 건 서민 정서에 부응한 것이었다. ‘또순이’ 역으로 함경도 사투리를 쓰던 도금봉(1930∼2009)만 해도 ‘부산댁’(1962)과 ‘왈순 아지매’(1963)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새댁’(1962)에서는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역할을 맡았다. 이같이 사투리로 상징되는 지방색이 적극적으로 노출되고 그것에 대중이 호응했다는 사실은 당시 지역성을 벗어난 범국가 차원의 통합적 발전이 지향되고 있었고 대중 역시 그것을 낙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영화 ‘또순이’ 마지막에 또순이와 남편 재구는 새나라 자동차를 타고 나타난다. 당시 군사정권은 자동차공업보호육성법을 표방하면서도 일본 닛산 블루버드를 수입해 새나라 자동차란 이름으로 팔게 했다. 영화에선 이 차가 두 사람의 행복한 미래를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수입 특혜 문제로 논란이 됐고 막 걸음마를 떼고 있던 국내 자동차 산업에 타격을 줬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합리적 여성 주체의 생기와 매력

이렇게 볼 때 ‘또순이’는 1960년대 초반에 국가 차원에서 추진된 근대화의 이념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는 영화다. 그래서 어용 영화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또순이’가 그만한 인기를 누리고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영화 자체에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매력은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힘들었던 여성 캐릭터 ‘또순이’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가 구현하는 화합과 통합, 그리고 낙관적 전망의 핵심에는 또순이의 오롯한 개성이 놓여 있는 것이다. 또순이가 아버지에게 가지는 독립심이나 남편 재구에 대한 계몽적 태도는 모두 가부장적 질서를 중심으로 한 근대화에 기여하는 것으로 귀결되기는 한다. 그런데 정작 그녀의 매력은 그런 효용 이면에 놓인 특유의 솔직함과 유연함에 있다. 또 그녀의 성격에는 경제적 합리성이 전제돼 있다. 그녀는 돈 문제에 대해서는 아버지에게조차 “정당한 노동 대가”를 지불하라며 노사 관계로 대응한다. 재구의 불만에 대해선 속마음을 털어놓아 위로하는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결혼을 끌어낸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생활에서는 한층 더 유연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쥐덫을 팔기 위해 쌀집에서 쥐를 봤다고 거짓말하고, 사기당한 타이어를 되찾기 위해 애처로운 처지를 가장한다. 그렇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그녀는 쥐덫을 팔되 하루 놓아 보고 효과가 없으면 도로 가져가겠다는 조건을 달고, 사기당한 타이어를 되찾자 이전에 자신에게 사기를 쳤던 이의 행각을 문제 삼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녀는 철저히 실리적으로 움직이며 상도(商道)를 지킬 줄 안다. 이러한 행동이 도금봉의 통통하고 야무진 외모와 깜찍한 함경도 사투리를 통해 나타날 때 또순이는 생명력 넘치는 매력적인 캐릭터로서 근대화의 희망을 효과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박유희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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