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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혁명시대 살아남아라”… 기업들 조직·일하는 방식 ‘대수술’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한국경제]

입력 : 2019-07-10 19:16:20 수정 : 2019-07-10 21: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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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기업 문화가 바뀐다 / 현대차, R&D조직 바꿔… 5→3개로 줄여 / 출퇴근 시간 유연화·복장 등도 자율화 / SK “행복·워라밸 위해 스스로 혁신하라” / 공유오피스 도입… 업무 집중·자율성 높여 / 대명그룹, 반바지 차림·문신·헤나 허용 / “CEO·직원 함께 한국적 모델 만들어야”

2010년 5월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 정장 차림의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핵심 임원 20여명이 공원 중앙 한 사당 앞에 멈췄다. 1932년 4월29일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에서 윤봉길 의사가 군 수뇌부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현장이다.

“훌륭한 분에겐 절을 해야 해!”

카랑한 회장 한 마디에 20여 노임원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했다. 인근 좌판대 할머니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좀 사드려.” 임원 여럿이 현금을 모아 기념품을 몽땅 구입한 뒤 자리를 떴다. 엑스포 참석 차 방중한 사이 만든 일정. 2004년에도 정 회장은 상하이 시장을 만나 임시정부 청사 주변 재개발 사업을 한국이 맡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일화는 정 회장의 인간적 면모와 함께 강력한 카리스마에 기반한 그 시절의 리더십을 여실히 보여준다. 10일 청와대가 경제계 간담회를 준비하며 ‘실질적 그룹 회장’으로 규정한 정의선 수석부회장이라면 어땠을까.

1970년생인 정 부회장은 ‘예의 바르고 합리적’, ‘과묵하지만 사람을 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평을 듣는다. 1999년 뉴욕에서 일본계 상사 근무를 마치고 현대차로 입사한 뒤 연구소 팀장 100여명과 가진 회식은 지금도 많은 이들 뇌리에 남아 있다. “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수십 개 테이블을 돌며 술잔을 비운 당시 정 상무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중견 간부가 된 한 참석자는 “우린 그날 ES맨이 됐다”고 말했다. 최근 제주 세미나에 참석한 신임 과장, 책임연구원들도 생경한 경험을 하긴 매한가지. 셀프 카메라를 든 14만 조직 총수는 수소전기차 넥쏘에 앉아 농담을 섞어가며 그룹 경영 계획을 전했다. “갑자기 제가 나와 놀랐죠” 하는 대목에선 박장대소가 터졌다.

세대교체를 끝낸 주요 그룹사를 필두로 재계 전반이 조직문화 혁신에 힘을 쏟고 있다. 수직적 문화는 점점 평평해지고 있다. 안정성과 규모의 경제를 중시하던 조직 구조는 ‘애자일(agile·민첩한) 조직’으로 바뀌고 있다. 조직문화의 혁신이 없으면 변화의 속도가 빠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이 엿보인다.

SK서린사옥 공유오피스

◆재계에 부는 조직문화 혁신의 바람

재계의 시도는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다. 한 그룹 정보팀 관계자는 “4대그룹만 해도 경쟁이 붙었다. 서로의 해법에 윗선들 관심이 비상하다”고 전했다.

전날 현대차그룹은 1만 연구개발(R&D) 조직을 대수술했다. 크게 5개 조직이 브랜드와 차종, 차급과 무관하게 맡은 일만 수행하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헤쳐모인’ 3개 조직이 이를테면 프로젝트별로 더 큰 재량을 갖는 방식이다. ‘까라면 까는’ 군대식 기업문화에 비견돼온 현대차그룹은 올 초 정 부회장이 “조직의 생각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에서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여러 조치를 단행했다. 출퇴근 및 점심시간 유연화, 복장자율화, 타운홀미팅, 상시채용 전환, 임원 직급 및 인사제도 개편 등이다. 양재동 사옥만 해도 대학 캠퍼스를 방불케 한다. 정장 차림은 방문자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한 직원은 “다른 회사는 몰라도 현대차는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변화”라고 말했다.

SK도 환골탈태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경영 화두인 ‘딥 체인지’에 ‘사회적 가치’와 ‘구성원의 행복’ 철학이 맞물려 ‘일하는 방식 혁신(일방혁)’으로 이어졌다. 생존에 방점을 찍는 다수 기업들과 달리 행복과 워라밸을 위해 스스로 혁신하라는 취지다. SK는 그 해답을 ‘공간’에서 찾았다. 구글 본사를 연상케 하는 ‘공유오피스’ 도입이 대표적이다. 초반만 해도 ‘원하는 자리에 앉아 일하는 게 혁신이냐’, ‘부작용도 클 것’이란 의구심이 있었지만 어느새 지위를 떠나 만족한 모습이다. 한 계열사 팀장은 “업무 집중도와 자율성이 둘다 오른 걸 체감한다. 워라밸도 절로 지켜진다”고 말했다.

중견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교원그룹은 최근 직급체계를 매니저, 연구원으로 일원화하고 복장자율화를 도입했다. 워킹맘·워킹대디를 위해 출퇴근 시간 규정도 없앴다. 대명그룹은 용모, 복장을 자율에 맡겨 반바지는 물론 문신, 헤나까지도 허용한다. 대교그룹도 출퇴근 시간을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정하고 있다.

◆“한국적 성공 모델 만들어야”

그간 혁신 노력은 성과를 거두고 있을까. ‘대한상의·맥킨지 한국 기업문화 및 조직 건강도 2차 진단 보고서(2018)’는 혁신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지 잘 보여준다. 대기업 직장인 20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47%는 최근 2년간 기업문화 개선 여부에 변화가 없거나 되레 나빠졌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82%는 캠페인성 활동을 경험했다고 밝혔고, 제도적 변화 등 혁신을 체감했다는 답변은 21%에 그쳤다.

심층 인터뷰에서도 직원들은 회사 △리더십 △성과관리 제도와 문화 △업무분장과 관리 △방향성에서 중하∼최하 점수를 줬다. ‘대안이 있는 것인지 불안하다.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다 끌고 간다’는 비판이 주류를 이뤘다. 최고경영자(CEO)들은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시도를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런 문화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수직=악, 수평=선’이란 이분법, 서구에 대한 무분별한 환상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넷플릭스 사례는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최근 근무시간, 휴가, 출장비 관련 규정을 없앴다. 자율성을 최고로 보장하되 가성비, 효율 등 성과에 대한 피드백(보상, 문책)은 반드시 한다는 전제다. 부정이 적발되면 ‘원스트라이크아웃’이다. 국내에 적용할 수 있을까. 자유는 가능하나 해고는 어렵다.

기업정보분석업체 한국CXO연구소 오일성 소장은 “서구 것을 가져와 적용한다고 혁신이 아니다”며 “좋든 나쁘든 우리에게는 유교문화가 있다. 내 것의 좋은 걸 지키면서 한국만의, 우리 회사만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정답은 조직 내부에 다 있다. 구성원들은 답을 안다”며 “CEO부터 모든 구성원이 같이 공감해야 개혁, 혁신이 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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