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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전고투’ 거칠고 어두운 바다 속 문화재 찾기 [문화재썰전]

관련이슈 디지털기획 , 강구열의 문화재 썰전

입력 : 2019-07-06 15:00:40 수정 : 2019-07-06 15: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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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사가 바다 속에서 발굴한 유물을 옮기고 있다. 

“잠수를 위하여 수면에서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다리를 위로 드는 순간부터 캄캄해 질 정도였고, 해저에서의 작업은 눈을 감은 상태나 다름없이 촉각에 의존해야 했다. 3년 동안 잠수한 중에서, 딱 한 번 약 20~30cm의 가시거리를 경험하였다.”

 

한국 수중고고학의 처음인 신안선 발굴에 참여했던 잠수사의 증언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바다 속에서 손으로 더듬어 발굴작업을 하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1976년 1차 발굴이 시작돼 1984년 10차 발굴까지 이런 상황은 크게 바뀌지는 않았으니 고선박과 도자기, 목공예품, 유리제품 등 수 만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수중발굴은 매번 비슷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다 자체가 극복하기 쉽지 않은 장벽입니다. 조류와 시야, 수심이 작업 조건을 결정하는 관건입니다. 그래서 수중발굴이 시작되고 한동안 해군에 크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문화재계가 자체 역량 강화에 나선 것은 2000년대 들어서입니다. 큰 발전을 거두었으나 수중발굴의 악전고투는 여전합니다.      

 

◆‘언제까지 해군에 의지할까’, 수중발굴의 도약

 

군대를 문화재와 연결시키는 건 사실 어색합니다. 접점이라고 할 만 한게 거의 없죠. 하지만 20세기 수중발굴의 성과는 상당 부분은 해군에 공을 돌려야 할 겁니다. 해군의 지원 아래 발굴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바다 위에서의 작업을 위한 장비 지원은 물론이고 긴 시간 수중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력은 군인 말고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신안선 발굴 때부터 그랬습니다. 발굴은 해군 해난구조대 소속 심해 잠수사들과 구난함 등의 협조 아래 진행됐습니다. 해군 자료에 따르면 신안선 발굴에 참여한 잠수사들은 연간 3474시간을 잠수했습니다. 유물을 꺼내왔고, 배 위에 있던 학자들에게 물속 상황을 알려주었습니다. 신안선 발굴은 해난구조대 창설 후 최장기간의 지원 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해군에의 의존은 초기 수중고고학의 한계로 꼽히기도 합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이 수중 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 수중발굴전문가는 “(신안선 발굴에는) 수중 사진이 없다. 바닷 속 시계가 워낙에 좋지 않기는 했지만 고고학자가 들어갔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사진을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군의 도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도모합니다. 그 계기가 된 것 중 하나가 2002년 서해 연평해전입니다. 당시 침몰한 참수리호 인양에 해군 잠수인력이 집중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발굴 지원 요청에 해군은 ‘언제까지 우리한테 의지할거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수중발굴을 이끌고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자체 역량 강화에 나섰습니다. 상급 기관인 문화재청 내부에서조차 부정적인 의견이 있었으나 잠수 인력 확충, 전담부서 설치, 장비개발 등에 나섰습니다.

 

최초의 수중탐사전용선 씨뮤즈호.

탐사전용선 2대의 존재가 특히 또렷합니다. 2006년 11월에 건조된 씨뮤즈호는 최초의 수중탐사전용선입니다. 씨뮤즈호의 도입으로 배를 빌려가며 작업을 했던 처지에서 겨우 벗어났습니다. 각종 장비를 싣고 나면 조사원들이 쉴 공간도 마땅치 않은 작은 배지만 마도 1·3·4호선, 영흥도선 발굴에 투입돼 제 몫을 다했습니다.

 

수중발굴에 필요한 각종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는 누리안호. 

2013년 누리안호의 투입은 큰 도약이었습니다. 290톤 규모로 20여 명의 조사원이 20일간 체류하며 발굴 조사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제토장비, 유물 인양·보관설비, 잠수병을 막기 위한 감압 챔버 등 수중발굴에 필요한 장비들을 두루 갖췄습니다. 인천 영흥도선 2차 조사에서 처음 현장에 투입되었습니다. 

 

◆‘거칠게 흐르는 어두운 바다를 극복하라’

 

잠수사들이 누리안호에서 수중발굴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기술, 인력, 장비 등의 현황은 과거와 비할 것도 없지만 바다는 여전히 큰 장벽입니다. 

 

작업 여건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물의 흐름, 즉 조류입니다. 물이 강하게 흐르는 사리(음력으로 15일이나 30일 전후)에는 잠수를 하기 힘들고, 약해지는 조금(음력으로 8일과 23일 즈음)을 앞뒤로 해 열흘 정도가 조사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1노트(약 시속 1.8km) 이상의 조류라면 잠수사가 바닥을 기어가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발굴에 필수인 촬영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잠수사가 앞으로 나가지 못할 지경으로, 정지해 있기 위해 오리발을 쉼없이 차야 합니다. 물살에 몸이 뒤로 밀리면서 젖혀지는 느낌으로 체력 소모가 엄청납니다. 2노트(약 시속 3.7km) 이상이면 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바다에서는 밀물, 썰물이 바뀌면서 바다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정조 시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합니다. 

 

시야 확보도 문제입니다. 수중발굴의 주무대인 서해의 탁한 바다 속은 잠수사들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들기 일쑤입니다. 부유물이 많아 빛이 투과되지 않을 정도죠. 이런 상황에서 손의 감각에 의지해 발굴 작업을 해야 합니다. 주요 수중발굴지역 중 하나인 진도는 시야가 잘 나와야 1m 정도고, 태안선이 발굴된 해역은 “비교적 시계가 확보되었다”고 하는 데도 평균 2m 가량에 불과했습니다. 

 

수심은 바다 속에서 활동 시간을 제한합니다. 5m 정도면 제한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10m가 넘어가면 1시간 30분, 20m에서는 1시간 가량 활동이 가능합니다. 30m 정도의 수심에서는 25분을 넘기면 위험합니다. 수중 발굴 현장은 대개 10~20m, 가장 깊은 외연도가 35m 정도였습니다.

 

신안선 발굴 현장으로 돌아가볼까요. 조류가 평균 2.5노트로 흘렀다고 합니다. 조금에는 1.5노트 정도고, 사리 때는 3.5노트로 치솟았습니다. 수심은 평균 20m였고, 조석(潮汐)에 따라 약 4m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속은 굉장히 어두웠습니다. 앞서 소개했던 잠수사의 증언 그대로 입니다.

 

태안 해역 발굴 보고서를 보면 바다 상황 때문에 작업을 못한 날의 기록을 찾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2007년 8월 9일 흐림/잠수조사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며칠 동안의 비, 바람으로 수중시계가 나빠 퇴수함. 오후가 되면서 기상이 악화되어 현장에서 철수함.”

 

“2011년 6월 9일(목) 안개, 비 26일차/오전조사에서…그리드 선체 내부 원통목 노출 작업을 했으나 시야가 매우 탁해 일찍 상승했다.”

 

물론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은 곳도 있습니다. 마도 2·3·4호선이 발견된 곳은 조류가 느리고, 수심이 얕습니다. 마도3호선이 매장된 곳은 수심이 3~6m로 얕은 편이어서 잠수 시간에 제한도 적습니다. 이 정도면 ‘축복받은 바다’라고 할 만 하답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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