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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소경(小京) 실체 밝힐 남원읍성 발굴조사 본격화

입력 : 2019-07-05 06:00:00 수정 : 2019-07-04 19: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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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읍성 북문지 안팎 문화재 발굴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적심 등 유구. 남원시 제공

전북 남원읍성(사적 제298호) 북문지 안팎에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건물지 유구가 집중 분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까지 문화층의 존재가 확인돼 문헌으로만 존재한 통일신라시대 5소경(小京) 가운데 하나인 남원경 단서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4일 남원시에 따르면 최근 남원읍성 북문지 안팎에서 확인된 건물지와 유구, 유물 등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고 남원소경(小京)의 단서를 밝히기 위해 발굴조사에 돌입하기로 했다.

 

남원읍성 북문지 밖 문화재 발굴 시굴조사 현장. 남원시 제공

이는 앞서 이뤄진 매장문화재 시굴 조사를 통해 안쪽 중앙공원 일대에서 통일신라∼조선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와 관련 유구, 유물을 확인한 데 따른 것이다. 건물 초석을 놓기 위해 땅을 다진 적심과 수혈(구덩이), 직선으로 구성된 도로 등이 확인됐고, 후백제 시기 기와, 초기 청자 중 하나인 해무리굽 청자 등도 출토됐다. 시굴조사는 문화재청 허가를 거쳐 전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지난해 12월부터 올 6월까지 진행됐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방리구획(坊里區畫·바둑판 형태로 만들어진 도시계획의 설계 구조)도 확인됐다. 방리구획은 국내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으로 고대 도시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그동안 고대 도시의 방리구획과 관련한 유적 발굴조사는 왕경(王京)이었던 경주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으며 지방도시로는 사벌주 상주 복룡동 유적 등 소수에 불과했다.

 

남원읍성은 통일신라시대 신문왕 11년(691년)에 처음 축조됐는데, 9주(州) 5소경(小京) 중 한 곳인 남원경(京)의 치소(治所)가 자리한 곳으로 알려져 이의 단서를 밝힐 수 있을지 관심을 끌고 있다.

 

남원읍성 북문지 일대 문화재 발굴 시굴조사에서 출토된 후백제시대 청자편. 남원시 제공

남원경은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성왕조실록 등 문헌기록으로 남아 있으나, 이와 연관 지을 수 있는 유적이 확인되지 않아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9주 5소경은 당시 수도가 한쪽(경주)으로 편재해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고, 지방 정복민을 통제하기 위해 전국을 9개의 주로 나눠 지방 관리를 파견해 관리토록 한 지방행정 제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따르면 남원읍성 성곽은 네모 반듯하고 둘레 8199자(약 2.5㎞)에 높이 13자(약 3.1m) 규모의 석축으로 축조됐다. 하지만 도시 규모에 맞춰 3.4㎞로 확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조선시대 선조 30년(1597년) 쵀적의 침입해 대비해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으로 일제 강점기 전라선 철도 개설과 근래 도시화 등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북쪽 212m만 남아 있다. 인근에는 왜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군사들과 주민들이 묻힌 만인의총(萬人義塚)이 자리하고 있다. 

 

남원=김동욱 기자 kdw7636@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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