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한·일 갈등 교착 국면에서 한·미·일 3각동맹을 관리하며 중재자 역할을 했던 미국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징용 판결 이후 한·일 갈등이 고조되고, 일본이 경제보복 조치까지 나선 지난 9개월 동안 미국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전통적 동맹 외교에 소극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로서는 한·일 갈등 관리에 어려움을 가중하는 요인이다.
지난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한국 수출규제 강화 조치 이후 4일까지 한·일 갈등 관련 미국 고위인사의 공개 발언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윌리엄 해거티 주일 미국대사가 지난 2일 내외정세조사회 주최 강연을 통해 “미국·일본·한국 세 나라의 관계 강화가 대북 협상의 성패를 좌우한다”며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되길 기대한다”고 말한 게 전부다. 해리 해리스 주한미국대사도 지난 1일 일본 정부 조치가 나온 뒤 관련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과거 미국은 과거사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 갈등이 고조됐을 때 주로 북핵 문제를 고리로 동맹국 두 나라를 중재했다. 2014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헤이그 회동을 주선해 박 전 대통령 취임 이후 첫 한·일 정상의 만남을 끌어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지난 2008년 독도 표기 관련 갈등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에게 검토를 지시하며 나름의 역할을 했다.
반면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동안 트럼프 행정부에서 가까스로 성사된 몇 차례 한·미·일 정상회담은 특별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올해만도 한·미 정상회담, 미·일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한·일 관계 개선 문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회담 의제에는 양국 협력을 촉구하는 정도로 가볍게 포함됐다. 한 전직 고위 외교당국자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와서 미국이 한·미·일 동맹 관리를 과거보다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무급 회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과거 교착 국면에서 3국 실무회담을 워싱턴 혹은 제3국에서 열어 이를 발판으로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곤 했으나 이 과정이 사라진 것이다. 한·미·일 외교장관회담 개최는 약 1년 전이 마지막, 3국 안보실장회의는 약 2년 전이 마지막이다.
미국의 역할 부재에 대한 지적은 자국 내에서도 제기된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북한으로부터 안보 위협과 중국의 군사력 확장 그림자 속에서 아시아 두 경제대국 간 긴장이 고조되면 미국이 전통적으로 개입해왔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의 두 동맹국이 다툴 때 눈에 띄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 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한국과 일본을 방문했으나 공식 석상에서 양국 갈등 문제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짚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고, 이게 과거 한·미·일 3국 협력 패턴에서 가장 달라진 점”이라며 “협력 촉구와 관련된 언급은 실무급에서만 나오고 있는데, 정상급에서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문제”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한국이나 일본 측에 실무급에서 이슈별로 선별적 조언을 할 때도 있으나, 당분간 정상급의 전격적 역할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명확하게 책임 문제를 거론할 수 있는 도덕적, 당위적 이슈가 아니고는 개입이 어렵다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주형 기자,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jh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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