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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선 보장하는데… 판결문 열람 ‘하늘의 별 따기’ [창간 30 알권리는 우리의 삶이다]

입력 : 2019-05-07 11:00:00 수정 : 2019-05-07 00: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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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확정 판결만 공개 … 접근 제한 / 변호사 93.7% “전면 공개 찬성” / 법관들은 개인정보 이유로 반대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

 

대한민국헌법 제9조의 첫 문장이다. 헌법 제정자들은 심리에 대해선 ‘국가안보나 선량한 풍속을 해칠 염려가 있으면 비공개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면서 판결 공개에는 아무런 제한도 두지 않았다. 법관이 선고한 판결 내용만큼은 무조건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취지에서다.

 

1987년 현행 헌법이 만들어지고 32년이 흐른 지금 이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고 있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에 더 가깝다. 일반인은 물론 법률 전문가인 변호사조차 판결문 접근이 어려운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법관이 아닌 이가 법원 판결문을 검색·열람하는 것은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이나 힘들다. 거의 유일한 방법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직접 찾아가 청사 3층 ‘판결정보 특별열람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서초동 법조타운 일대에 사무실이 있는 변호사들이 주로 애용한다. 그런데 열람실 안에 사용 가능한 컴퓨터가 4대뿐이어서 2주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이용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예약 자체도 ‘하늘의 별 따기’다. 더욱이 서울 등 수도권 거주자가 아니라면 장거리 이동까지 감내해야 한다.

 

6년차 변호사 A(37)씨는 “예약을 못 하면 아침부터 열람실에서 죽치고 있다가 예약자가 없을 때 잠깐 컴퓨터를 쓰곤 한다”며 “이렇게 제한적인 방법 말고 국민의 알권리 보장 차원에서 판결문의 전면 공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법원 열람실 방문 외에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사이트’에 접속하는 방법이 있긴 하다. 여기선 확정 판결문만 열람이 가능해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진행 중인 사건의 1·2심 판결문은 볼 수 없다.

 

그나마 피고인, 참고인, 증인 등의 이름이 모두 블라인드 처리된 이른바 ‘비실명화’ 판결문이어서 별 도움이 안 된다.

 

◆국민 “알권리 전면 보장” VS 법관 “개인정보 보호”

누가, 어떤 이유에서 판결문 공개를 원할까. 일반인도 본인이 소송 중이거나 법률 관련 시민단체에서 활동한다면 판결문 검색·열람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업무상 법원 또는 검찰청을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 변호사들한테 판결문 공개가 가장 절실하다.

10년차 변호사 B(44)씨는 “새로 사건을 맡게 되면 보통은 예전에 있었던 비슷한 사건에서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찾아보게 된다”며 “판례를 찾아 읽은 뒤 주요 법리적 쟁점을 정리해 재판부에 낼 서면을 작성하거나 법정에서 할 변론을 구상하곤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한변호사협회가 지난해 6월 회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 1586명의 93.7%가 “모든 판결문의 전면적 공개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칼자루’를 틀어쥔 법원의 기류는 정반대다. 대법원이 지난해 5월 전국 법관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1117명 가운데 70% 이상이 “미확정 판결문 공개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형사사건은 민사사건보다 반대율이 더 높아 78.3%에 달했다. 판사 10명 중 거의 8명꼴로 판결문 공개에 거부감을 드러낸 셈이다.

이처럼 법원이 판결문 공개에 소극적인 이유는 ‘개인정보 유출’ 우려다. 일례로 형사사건 판결문 원본에는 피고인의 주민등록번호, 주소지, 전화번호부터 그가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지, 범행에 동원한 흉기와 수법은 무엇인지 등이 생생히 적혀 있다. 공범은 물론 피해자와 참고인, 증인 등의 실명도 볼 수 있다.

 

물론 법원이 외부에 공개하는 판결문은 원본이 아닌 사본이다. 공개 전에 민감한 개인정보를 감추는 비실명화 작업을 하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한 판결문에 여러 번 등장하는 이름 중 단 하나라도 실수로 블라인드 처리를 빠뜨리면 개인정보 유출은 시간문제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형사사건 판결문, 더군다나 확정되지도 않은 하급심 판결문이 아무 제한 없이 공개되다 보면 개인의 각종 신상정보가 외부로 유포될 수 있다”며 “이 경우 범죄 피해자는 2차 피해, 증인이나 참고인은 보복 위협에 각각 시달리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지적했다.

◆형사사건 판결문 공개하니… 하루 평균 206건 열람

이 같은 법원의 걱정은 분명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법관들이 염려하는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부작용과 판결문 전면 공개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를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더 크다는 게 대다수 변호사의 견해다. 특히 우리 법원의 ‘고질’로 치부되는 전관예우의 폐단을 없앨 ‘특효약’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재야법조계를 대표하는 이찬희 변협 회장은 지난달 25일 ‘법의날’ 기념식에서 “하급심 판결이 전부 공개되면 특정한 판사가 같은 내용의 사건에 대해 어떤 피고인에게는 실형을 선고하고, 어떤 피고인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인지가 파악된다”며 “판결문의 전면 공개는 전관예우의 폐해를 실효성 있게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사실 변호사들 사이엔 ‘개인정보 보호는 표면적 명분일 뿐 법원이 미확정 판결문 공개를 꺼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7년차 변호사 C(38)씨는 “판사들이 자신이 쓴 1심 판결문의 하자가 법원 바깥에 알려지면 법조계에서 평판이 나빠지거나 언론에 비판 기사가 실릴 수 있으니 일부러 감추려는 것 아닐까”라고 꼬집었다.

 

그나마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후 본격화한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대법원은 올해부터 형사사건 판결문 인터넷 검색·열람 서비스를 시행 중이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특정한 피고인 이름이나 사건번호 대신 아무 검색어나 입력하면 해당 단어가 들어간 형사사건 판결문을 찾아주는 식이다.

변호사들은 “형사사건 판결문 검색·열람이 전보다 쉬워졌다”며 반기는 분위기다. 세계일보 취재팀이 법원행정처에 정보공개를 청구한 결과 올해 1월1일부터 지난달 21일까지 111일 동안 외부인이 이 시스템으로 열람한 판결문만 총 2만2848건에 달했다. 하루 평균 약 206건의 판결문 열람이 이뤄진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정된 형사사건 판결문만 제공한다는 한계는 여전하다. 상급심에서 심리가 진행 중인 하급심 판결문은 접근 자체가 차단되는 것이다. 2013년 1월 이후 선고한 판결문만 볼 수 있고 그 이전 판결문은 검색이 안 되는 점도 향후 개선해야 할 대목이다.

전수미 경희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변호사)는 “확정되지 않은 하급심 판결문 미공개는 국민의 정보 접근권을 제한하는 잘못된 제도”라며 “많은 법학 연구자와 실무자가 법조문화 발전, 법률 서비스의 질 향상, 법학 연구자료 충실화 등을 위해 하급심 판결 전면 공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고 전했다.

◆헌재, 31년치 결정문 전부를 홈페이지에서 열람 가능

헌법재판소는 별도의 하급심이 없고 최종심 하나뿐인 점, 따라서 헌재 결정은 선고와 동시에 확정된다는 점 등에서 법원과 큰 차이가 난다. 다루는 사건 수도 헌재가 법원보다 훨씬 더 적다.

이처럼 헌재와 법원의 단순 비교는 곤란하지만 결정문 공개와 관련한 헌재의 정책은 법원이 ‘벤치마킹’을 할 만하다. 헌재는 1988년 9월 출범 후 선고한 결정문 전체를 홈페이지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놨다. 헌재의 한 관계자는 “모든 결정문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되며 날짜별, 인용 여부별로도 검색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물론 헌법소원 청구인이나 단순 참고인의 이름 같은 개인정보는 블라인드 처리로 가린다. 헌재가 다루는 사안의 특성상 전·현직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같은 공인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모두 실명이어서 검색이 가능하다.

일례로 검색창에 ‘문재인’을 입력하면 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대리한 헌법소원 사건부터 대통령 취임 후 그를 상대로 제기된 헌법소원 사건까지 20여건의 결정문을 모두 열람할 수 있다. 최근 헌재에서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낙태죄 헌법소원의 경우 굳이 사건번호(‘2017헌바127’)나 사건의 정식 명칭(‘형법 제269조 제1항 등 위헌소원’)을 몰라도 ‘낙태’라는 검색어만 입력하면 바로 결정문을 찾을 수 있어 일반인도 편리한 이용이 가능하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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