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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이 형님의 서방님이라고?" [이슈 속으로]

입력 : 2019-02-09 12:37:19 수정 : 2019-02-09 16: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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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마다 ‘차별적 가족호칭’ 도마에/아버님·장인, 형님·아주머니…/부계 중심의 불편한 호칭에/만나도 서먹서먹… 대화 단절/아가씨→OO씨, 시댁→시가/젊은세대 중심 변화 움직임/여가부 “상반기 개선안 발표”
“형님이 갑자기 내 남편을 ‘서방님’이라고 부르더라.” 올해로 결혼 6년 차를 맞은 김모(31)씨는 결혼 후 첫 명절 시댁에서 당황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는 “형님(남편 형의 아내)의 서방님 소리에 남편도 당황해 얼굴이 빨개졌다. 서로 불편하다고 말해 다시 ‘도련님’으로 돌아왔다”며 “사실 그 호칭도 달갑진 않았다. 형님은 손아래 남편을 ‘도련님’이라 부르는데 아주버님은 날 ‘제수씨’라고 한다. 누구는 ‘님’이고 누구는 ‘씨’라니. 말로는 부부는 평등하다지만 호칭만 봐도 불평등한 것 투성이”라고 토로했다.

곧 결혼을 앞둔 박모(32)씨도 얼마 전 호칭 문제로 예비 남편과 크게 다퉜다. 그는 “남편의 여동생은 ‘아가씨’인데 아내의 여동생은 ‘처제’다. 차별이라 생각해 남자친구에게 말했더니 ‘전통이고 다들 그렇게 하는데 뭐가 문제냐’며 다툼이 일었다”며 “호칭에 따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결혼 전에 이 문제를 꼭 정리하고 넘어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설 명절과 맞물려 가족 간 차별적인 호칭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남편과 아내 가족을 부르는 호칭 사이의 격차가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논란이 제기되면서다.

◆남편 동생은 ‘도련님’, 아내 언니는 ‘처형’

국립국어연구원이 2017년 펴낸 ‘사회적 소통을 위한 언어 실태 조사(10~60대 4000명 대상)’에 따르면 호칭어·지칭어에 관한 의견 중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86.3%로 압도적이었으며, 이 중 ‘양성평등’에 관한 내용이 34.7%로 가장 많았다.

부계사회 중심의 ‘남존여비’ 사상은 가족 간 호칭 속에도 뿌리 깊게 박혀있다. 남편 쪽 가족은 ‘시댁(媤宅)’이라 높이지만, 아내 쪽 가족은 ‘처가(妻家)’라고 낮추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남편의 부모님은 ‘어머님’ ‘아버님’이지만 아내의 부모님은 ‘장인’ ‘장모’다. 남편의 손아래 동생은 ‘도련님’ ‘아가씨’라 칭하는 반면, 아내 쪽은 ‘처남’ ‘처제’라 부른다. 심지어 남편 형의 부인은 ‘형님’ 소리를 듣지만, 아내 오빠의 부인은 ‘아주머니’라 불리기도 한다.
◆비현실적인 호칭 체계에 가족 간 갈등도

현실과 호칭 체계의 괴리는 가족 간 소통을 저해하기도 한다. 14살 연하 아내와 결혼한 김모(46)씨는 “내 막내 여동생이 아내보다 8살이나 많은데 아내를 ‘올케 언니’라 불러야 하니 어색하고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여동생이 아내와 대화를 잘 안 하려 했다”며 “나중에 우리끼리 ‘올케’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그래도 경어는 써야 해서 대화할 때마다 부자연스럽다”고 털어놨다.

친가와 외가로 나누는 이분법적 호칭이 친척 사이의 친밀도마저 구분 짓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세 살배기 딸을 둔 한모(31)씨는 “어릴 적 친가가 아버지 쪽이니 외할머니보다 친할머니를 더 가까워해야 한다고 ‘세뇌’받았던 것 같다.

외할머니도 은연중에 ‘외손주보다는 친손주’라고 말씀하셔 어린 마음에 상처받기도 했다”며 “딸에겐 일부러 친가·외가를 나누지 않고 다 ‘할머니’라고 한다. 아직 세 살이지만 그렇게 해도 어느 할머니인지 다 알아듣는다”고 설명했다.

◆민우회 “며느리는 기생하는 존재라는 뜻”… 젊은 세대 중심으로 변화 움직임

2006년부터 가족호칭개선운동을 펼쳐온 한국여성민우회(민우회)는 “남편의 여동생이나 남동생을 호칭하는 ‘아가씨’와 ‘도련님’은 과거 종이 상전을 높여 부르던 표현”이라며 “‘며느리’는 ‘며늘/미늘/마늘+아이’의 구조로 ‘며늘’이란 말은 기생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즉,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딸려 더부살이로 기생하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비판했다.

인식 변화에 발맞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 호칭 문화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관측된다.

‘도련님·아가씨·처남·처제’ 대신 ‘○○(이름)씨’로 부르고 ‘시댁·처가’ 대신 ‘시가·처가’, ‘시댁·처댁’이라 칭하는 식이다. ‘친할머니·외할머니’ 대신 ‘□□(지역명)할머니’라 부르거나 모두 ‘할머니’로 통일하는 가정도 있다.

껄끄러운 호칭 대신 자녀의 눈높이에 맞춘 호칭을 쓰기도 한다. 남편의 남동생을 ‘삼촌’으로, 손아래 시누이(남편의 여동생)의 남편을 ‘서방님’ 대신 ‘고모부’라 부르는 게 그 예다.

확정된 개선안 없이 호칭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충돌이 일기도 한다.

이모(30)씨는 이번 설 시댁에서 남편의 남동생을 ‘○○씨’로 불렀다가 곤욕을 치렀다. 그는 “시댁 어른들이 모두 ‘결혼했으니 이젠 도련님이라 불러야 한다’고 한마디씩 하셨다.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며 “남편은 우리 언니도 ‘처형’이라고 ‘님’자를 빼고 부른다. 불공평하다고 말했지만 이해 못 하시더라. 명절이 더 싫어졌다”고 말했다.
◆정부 “상반기 중 개선 권고안 발표 예정”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28일부터 4주 일정으로 ‘가족호칭에 대한 국민조사’를 하고 있다. 시민들의 참여 열기도 뜨겁다.

너무 많은 접속자가 몰려 설문조사 첫날 홈페이지가 먹통이 되기도 했다. 지난 6일 기준 참가 인원만 3만1000여명에 달했다.

여론의 방향은 조사 중간 결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댁/처가’ ‘도련님·아가씨/처남·처제’ ‘장인 어른·장모님/아버님·어머님’, ‘할머니·할아버지/외할머니·외할아버지’, ‘형님/처형’ 등의 호칭에 대해 참가자 90% 이상이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또 ‘가족 내에서 부르거나 가리키는 말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96.3%가 공감했고, ‘가족 내에서 부르거나 가리키는 말이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나?’라는 질문에 ‘현실을 반영하도록 고친다’는 의견이 81.9%로 높았다.

여가부는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민간 전문가와 함께 공청회를 진행한 뒤 상반기 중 개선 권고안을 낼 계획이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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