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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신(新) 군사갈등 시대’ 도래하나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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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30 09:58:00 수정 : 2019-01-30 09: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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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에서 유명한 명제 중에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없다’는 것이 있다. 흔히 말하는 민주평화론(民主平和論)이다. 18세기 말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전개한 주장을 발전시킨 것이다.

“사회현상 중 예외가 없는 유일한 명제”라고까지 불렸던 민주평화론이 최근 동아시아에서 어긋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이 레이더 및 초계기 저공위협비행 문제를 놓고 지난달부터 외교적, 군사적 대치를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한일 간에 수많은 갈등과 논란이 있었으나, 대부분 ‘말폭탄’으로 끝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양국의 국방부장관이 일선 부대를 방문할 정도로 군사적 대응이 부각되고 있다. 과거사와 독도 문제에 국한됐던 갈등이 군사분야로 확대됐다는 측면에서 양국 간 갈등의 수준은 전례가 없다는 평가다.

국방부는 24일 일본 해상초계기의 근접 위협비행 모습을 촬영한 영상을 공개했다. 전날 오후 2시3분께 이어도 서남방 131㎞ 떨어진 공해상에서 정상적인 작전 활동을 펼치던 해군 구축함 대조영함을 향해 일본 P-3 초계기가 540m까지 접근했으며 해수면에서 60~70m 높이로 저고도 비행을 했다. 국방부 제공
◆한일 안보 구도 ‘협력→갈등’ 변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단을 선언하기 전까지 공고하게 유지됐던 한일 안보협력은 레이더 및 일본 초계기 저공비행위협 논란이 불거지면서 갈등구도로 급변했다. 협력보다 갈등이 부각되면서 양국 국방교류협력도 위축되는 모양새다.

정경두 국방부장관은 26일 해군작전사령부를 방문, 일본 초계기의 저공위협비행에 대해 “우방국에 대한 도발”이라고 비판하면서 “우리 군의 대응 수칙대로 적법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정 장관은 “일본 초계기의 네 차례 위협 비행은 세계 어느 나라 해군도 용납할 수 없는 위협적인 행위며,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지도 않은 우리 해군의 추적 레이더 조사(照射:비춤)를 주장하며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언행”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정 장관의 해작사 방문에 대해 “장병 위무를 위한 것으로 정치적인 것과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군 안팎에서는 25일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일본 방위상이 해상자위대 아쓰기(厚木) 기지를 방문해 “주변 해역의 경계 감시 활동을 착실하게 실시하라”고 지시한 것에 대한 맞대응 성격을 지닌 발언이라는 평가다.

일본 방위성은 지난달 20일 우리 해군 구축함 광개토대왕함이 동해상에서 일본 해상초계기의 레이더 겨냥 논란과 관련해 초계기 영상을 같은달 28일 공개했다. 방위성 동영상 캡쳐
박한기 합참의장도 25일 지휘서신 1호를 통해 일본 초계기의 근접 비행과 관련한 우리 군 작전 대응 시간 단축과 함께 신속하고 정확한 상황 보고 체계 확립을 주문했다. 군은 제3국 초계기가 우리 함정과 5마일(9.3㎞) 거리 이내에 들어왔을 때 시행했던 경고통신을 10마일(18.5㎞)로 연장하고 문구도 강한 톤으로 바꾸며, 위협 비행이 있으면 함정에서 해상작전헬기를 출동시켜 초계기의 항로를 막는 방안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군 당국이 ‘강 대 강 대치’ 국면에 접어들면서 국방교류협력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방위성은 오는 4월 해상자위대 함정 이즈모의 부산 입항 계획을 재검토중이다. 이즈모는 4월 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확대 국방장관회의(ADMM-Plus)를 계기로 개최되는 해양한보훈련 참가를 위해 부산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우리 해군은 다음달로 예정됐던 1함대사령관의 일본 방문을 연기했다. 국내에서는 한일 국방교류협력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이 폐기 요구에 직면해 있다. 양국 군 당국간 협의가 이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다자간 협의체인 서태평양해군심포지엄(WPNS)에서 해군 함정 및 항공기 조우 시 관련 절차를 다룬 CUES(Code for Unplanned Encounters at Sea)라는 해상규범을 근거로 국제사회의 판단을 구해보자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CUES는 신사협정으로 강제력이 없어 국제 여론전 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미국의 중재가 없다면 양자, 다자 대화 모두 여의치 않은 셈이다.

국방부가 지난 4일 공개한 지난해 12월 20일 조난 선박 구조작전 중인 광개토대왕함 상공에 저고도로 진입한 일본 초계기 모습(노란 원). 국방부 제공
◆한일 ‘힘의 불균형’이 日 도발 초래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우방국으로 미국과 긴밀한 안보협력을 추구하는 나라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한다. 군사적 갈등이나 긴장 고조가 이뤄지기 힘든 관계다. 하지만 일본 초계기 저공위협비행 문제가 불거지면서 양국간에 형성됐던 군사적 신뢰 관계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양국간 힘의 불균형에 기인한다. 군사력과 경제력, 역내 영향력 등에서의 일본 ‘쏠림’ 현상이 갈등과 충돌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힘의 균형이 유지됐다. 경제력과 해군 및 공군력에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앞섰지만, 미국이라는 변수가 추가되면서 한일간 힘의 균형이 이뤄졌다.

미국의 핵추진항공모함이 매년 동해상에서 한국 해군과 함께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전략폭격기와 스텔스 전투기가 한국 내륙 지역을 누비며 훈련을 했다. 동해안에서는 한미 해병대원들이 연합상륙훈련을 실시했다. 서울에서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의한 작전계획 점검 및 보완이 매년 반복됐다. 

국방부는 24일 일본 해상초계기의 근접 위협비행 모습을 대조영함에서 촬영한 적외선 영상을 공개했다. 국방부 제공
한미 연합훈련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역할도 했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군의 핵심 전력이 매년 한반도에 전개하는 상황에서 도발적인 행동을 취할 주변국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남북 화해 분위기와 북미 대화를 촉진하기 위해 대규모 한미 연합훈련을 유예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상징하는 핵항모와 전략폭격기를 비롯한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중단됐다. 연합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이나 미 본토에서 한반도를 오가는 병력도 크게 줄었다. 미군의 무력시위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여기에 ‘세계의 경찰’ 역할을 맡지 않으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기조가 겹치면서 동아시아 지역 정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온 강력한 힘은 공백 상태를 맞이했다.

힘의 공백은 곧 불균형으로 이어졌다. 미국이라는 존재에 가려졌던 한일 간 힘의 불균형이 드러난 것이다.

한일 간 힘의 불균형에 직면한 아베 신조 정권이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는 분명치 않다. 현 단계에서 아베 정권의 의사결정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초계기 저공위협비행처럼 도발적 행동을 한 결과 군사행동이 시작됐을 때 한국이 이길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본이 군사행동을 한다 해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한국의 우방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아베 정권이 냉철한 군사적 분석에 의한 대외정책 대신 도발적 행동이 앞섰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해군 유도탄고속함에서 해성 대함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해군 제공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국가간 충돌 가능성을 낮추고 상호 의존도를 높여 국제 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 시스템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가치 공유’가 도깨비 방망이처럼 만능열쇠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상호 의존, 국제법 등의 시스템도 힘의 불균형 앞에서는 무력하다. 2008년 8월 러시아와 조지아가 남오세티아 문제를 놓고 전쟁을 벌였을 때, 조지아는 러시아군의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한 채 5일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장미혁명’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미국 등 서방측과 우호관계를 맺었지만,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주변국의 도발에 맞대응하는 것은 힘의 균형이 이뤄져야 가능하다. 그래야 상대방이 오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정도 자제를 해야 한다. 자칫하면 러시아에 의해 국토를 짓밟힌 조지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초계기 갈등 확산을 방지하면서 위기관리를 하고, 중장기적으로는 한일간 힘의 불균형을 해소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한일 안보협력이 안보갈등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는 현실에서 우리의 힘을 키우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초계기 저공위협비행이 재연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 국제정치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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