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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42%' 성적 학대 '68%'… 우리나라 '이주여성' 이야기 [이슈&현장]

입력 : 2019-01-29 15:41:00 수정 : 2019-01-28 17: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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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의 ‘젠더 불평등’ /42% “가정폭력 경험”/ 20% “흉기 위협 당해” 68% “성적 학대”/ 생활비·재산 도맡아 관리 10명 중 1∼2명뿐/ 집안일·자녀보육 떠맡아/“남편이 가사 동참” 응답자 1∼5% 불과/ 30% “집안일과 병행 어려워 직장 관둬"/ 말뿐인 양성평등 지원/ 인권정책 단순 가정폭력 예방에만 집중/ 전국 218곳 다문화가족센터 '수수방관'
지난달 경남 양산시의 한 주택에서 필리핀 출신 30대 이주여성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 조사 결과 남편 B(60)씨가 부부싸움 중 흉기로 수차례 찌르고 목을 졸라 숨지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2011년 결혼하면서 한국에 건너왔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을 대신해 한 달 120만원 남짓 수입으로 생계를 책임져온 것으로 전해졌다. 결혼 이후 필리핀 친정을 찾은 적도 없었다. 사건 이후 딸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는 유족의 사연이 알려졌고, 지역 공공기관과 시민단체가 성금을 모아 운구 비용을 댔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가 돼서야 필리핀 현지서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A씨가 한국에 들어오고 7년 만에 이뤄진 귀향이었다.

연이은 ‘미투(me too)’ 폭로 등 우리 사회의 성 평등을 요구하는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으나 A씨 같은 결혼이주여성은 이러한 흐름과는 동떨어진 ‘외딴섬’ 신세나 다름없다. 결혼이주여성은 A씨의 경우처럼 살인, 성폭행 등 극단적 폭력에 노출돼있는 데다 평소 부부관계 내 의사결정권 제한, 편중된 가사·돌봄노동 등 일상 속 불평등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문화가족 내 성 평등은 여전히 요원하다는 얘기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최근 연구보고서를 통해 다문화가족 내 젠더 불평등이 여전히 법·정책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주여성 둘러싼 젠더 불평등

28일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결혼이주여성 92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절반에 가까운 387명(42.1%)이 가정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했다. 이 중 38.0%(147명)가 가정에서 폭력 위협을 당했고, 19.9%(77명)는 흉기로 협박당했다. 성행위를 강요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주는 성적 학대를 당한 여성은 무려 68.0%(263명)에 달했다.

이런 가정폭력은 이주여성이 겪는 젠더 불평등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가정 내 의사결정 권한, 가사·돌봄노동 분담 정도 등을 살펴보면 그 불평등의 정도는 더 깊고 범위도 넓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다문화가족 내 성 불평등 실태와 정책 방향’에 따르면 다문화가족 내 이주여성이 생활비 지출, 재산관리 등 경제 관련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는 10명 중 1∼2명에 불과했다. 중국(한국계 제외)·필리핀·베트남 출신 아내 500명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생활비 지출 결정을 본인이 도맡아 한다고 답한 비율은 26.8%, 재산관리는 14.6%였다. 한국인 아내의 경우 생활비 지출은 60.4%, 재산관리는 28.8%가 전담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주여성의 가족 내 의사결정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반대로 부부간 가사·자녀 돌봄 노동의 경우, 아내 쪽으로 쏠림 현상을 보였다. 식사 준비 87.0%, 세탁 83.0%, 집 안 청소 77.8%, 장보기 67.7%의 비율로 자신이 전담하고 있다고 답했다. 남편이 한다는 응답자는 약 1∼5% 수준에 그쳤다. 자녀 돌봄도 밥 먹이기, 옷 입히기의 경우 아내가 한다는 비율이 80%를 넘었다. 다만 동화책 읽어주기, 글자 가르치기, 교육(보육)시설 정보 알아보기 등 교육의 경우엔 40∼60%대였다.

김이선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교육의 경우 이주여성의 특수성 때문에 부담이 작지만 관련 의사결정 권한 또한 작아 ‘주변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주여성 10명 중 3명(29.6%)은 가사, 자녀 돌봄 등 이유로 일을 그만둔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이주여성들이 취업을 선호하지만, 가정 노동의 부담 탓에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이주여성 위한 성 평등’의 부재

이런 상황에도 관련 법·정책 분야에서 다문화가족 내 성 평등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는 ‘공백 상태’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추상적으로 성 평등을 언급하는 데 그치거나, 단순 가정폭력 예방에만 정책 역량이 모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현행 다문화가족 정책의 법적 기반이 되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다문화가족이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한 가족관계를 누릴 수 있도록 가족상담, 부부교육, 부모교육, 가족생활교육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한 가족관계’란 무엇인지, 어떤 점이 문제가 되고 어떤 방향으로 가족상담, 부부교육 등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지 등 구체적 방향성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연구보고서에서 “다문화가족 정책에 다문화가족의 성 불평등 문제 혹은 성 평등한 가족생활이 정책의제로 채택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 정책으로 구현될 만한 수준으로 의제가 구체화하지 못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이 법을 근거로 수립돼 여성가족부의 정책 추진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는 제3차 다문화가족정책 기본계획(2018∼2022년)은 이주여성 성 평등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안정적 가족생활의 유지’만 강조하고 있을 뿐, 과제로 제시한 ‘이주여성 인권 강화’도 가정폭력 예방에 대한 내용이 전부였다.

지난해 말 기준 전국 218곳에서 운영 중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도 성 평등에 둔감하긴 마찬가지다. 다문화가족지원법에 근거해 운영되는 이 센터는 기본사업으로 성 평등 영역 프로그램을 운영토록 하고 있지만, 그 사업 목적을 ‘성 평등 인식 고취’라고만 명시했을 뿐 사업 내용이나 운영 방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부재했다.

김 연구위원은 “근간이 되는 법에서부터 다문화가족 내 성 평등에 대한 구체적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정책이나 사업에 ‘성 평등’이란 말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다문화가족 구성원에 양성평등의 권리와 의무 부여를 위한 양성평등기본법 개정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동시 작동하는 중층적 차별문제의 정책 의제화 등을 제안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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