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은 ‘미투(me too)’ 폭로 등 우리 사회의 성 평등을 요구하는 물결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으나 A씨 같은 결혼이주여성은 이러한 흐름과는 동떨어진 ‘외딴섬’ 신세나 다름없다. 결혼이주여성은 A씨의 경우처럼 살인, 성폭행 등 극단적 폭력에 노출돼있는 데다 평소 부부관계 내 의사결정권 제한, 편중된 가사·돌봄노동 등 일상 속 불평등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문화가족 내 성 평등은 여전히 요원하다는 얘기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최근 연구보고서를 통해 다문화가족 내 젠더 불평등이 여전히 법·정책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주여성 둘러싼 젠더 불평등
28일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결혼이주여성 92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절반에 가까운 387명(42.1%)이 가정폭력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했다. 이 중 38.0%(147명)가 가정에서 폭력 위협을 당했고, 19.9%(77명)는 흉기로 협박당했다. 성행위를 강요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주는 성적 학대를 당한 여성은 무려 68.0%(263명)에 달했다.
이런 가정폭력은 이주여성이 겪는 젠더 불평등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가정 내 의사결정 권한, 가사·돌봄노동 분담 정도 등을 살펴보면 그 불평등의 정도는 더 깊고 범위도 넓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보고서 ‘다문화가족 내 성 불평등 실태와 정책 방향’에 따르면 다문화가족 내 이주여성이 생활비 지출, 재산관리 등 경제 관련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는 10명 중 1∼2명에 불과했다. 중국(한국계 제외)·필리핀·베트남 출신 아내 500명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생활비 지출 결정을 본인이 도맡아 한다고 답한 비율은 26.8%, 재산관리는 14.6%였다. 한국인 아내의 경우 생활비 지출은 60.4%, 재산관리는 28.8%가 전담하는 것과 비교하면 이주여성의 가족 내 의사결정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김이선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교육의 경우 이주여성의 특수성 때문에 부담이 작지만 관련 의사결정 권한 또한 작아 ‘주변적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주여성 10명 중 3명(29.6%)은 가사, 자녀 돌봄 등 이유로 일을 그만둔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이주여성들이 취업을 선호하지만, 가정 노동의 부담 탓에 직장생활을 유지하는 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이주여성 위한 성 평등’의 부재
이런 상황에도 관련 법·정책 분야에서 다문화가족 내 성 평등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는 ‘공백 상태’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추상적으로 성 평등을 언급하는 데 그치거나, 단순 가정폭력 예방에만 정책 역량이 모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현행 다문화가족 정책의 법적 기반이 되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다문화가족이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한 가족관계를 누릴 수 있도록 가족상담, 부부교육, 부모교육, 가족생활교육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민주적이고 양성 평등한 가족관계’란 무엇인지, 어떤 점이 문제가 되고 어떤 방향으로 가족상담, 부부교육 등 조치가 이뤄져야 하는지 등 구체적 방향성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지난해 말 기준 전국 218곳에서 운영 중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도 성 평등에 둔감하긴 마찬가지다. 다문화가족지원법에 근거해 운영되는 이 센터는 기본사업으로 성 평등 영역 프로그램을 운영토록 하고 있지만, 그 사업 목적을 ‘성 평등 인식 고취’라고만 명시했을 뿐 사업 내용이나 운영 방법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부재했다.
김 연구위원은 “근간이 되는 법에서부터 다문화가족 내 성 평등에 대한 구체적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정책이나 사업에 ‘성 평등’이란 말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다문화가족 구성원에 양성평등의 권리와 의무 부여를 위한 양성평등기본법 개정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동시 작동하는 중층적 차별문제의 정책 의제화 등을 제안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