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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변한 선수촌…도망칠 수도 없었다 [심층기획 - 성폭행·폭력에 짓밟힌 스포츠인권]

입력 : 2019-01-16 21:39:54 수정 : 2019-01-18 12: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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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금메달 지상주의’ 어두운 이면 / 엘리트체육정책 명목 폭력 정당화 … 선수촌 폐쇄성도 한몫/국제대회 좋은성적 내기 위해/국가대표 한데 모아 합숙훈련/군대처럼 엄격한 통제속 생활/
지도자·선수 ‘상명하복’ 관계/선진국, 클럽시스템 대표 배출/생활체육 패러다임 전환 필요
현재 우리나라의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이 정착한 것은 군사정권 시절이던 1966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릉선수촌이 문을 연 이후 진천선수촌까지, 국가대표들을 한데 모아 집단 훈련시키는 현재의 시스템은 메달을 따기 위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미명 아래 스포츠는 통치의 한 방편이 됐고 온 국민은 TV를 지켜보며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때마다 자기 일처럼 열광했다.

하지만 이런 성적 지상주의가 가져온 엘리트 스포츠의 폐단과 한계가 ‘스포츠 미투’와 폭행사건을 계기로 이제 수면 위에 드러났다. 금메달 몇 개를 따서 종합순위 몇 위를 거두겠다는 목표 아래 선수들의 인권은 그동안 철저히 유린된 것이다. 특히 선수촌의 폐쇄성과 상명하복 체계는 지도자가 선수를 ‘성노예’로 만들거나 분노와 폭행을 ‘배설’하는 공간으로 변질됐다. 이에 세계일보는 심층기획 시리즈를 통해 한국 엘리트 스포츠 육성책의 폐단과 집단 합숙 훈련의 문제점을 집중 조명한다.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산실로 불리는 진천선수촌 전경. 최근 불거진 체육계 성폭행·폭력 사태의 원인 중 하나로 엘리트 선수들의 훈련시스템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한계 노출된 엘리트 스포츠

2016 리우올림픽 시상식 현장. 은메달을 따낸 한 한국 선수는 마치 죄인처럼 시상식 단상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두 모인 올림픽에서 2등은 엄청난 성과다. 외국 선수들은 동메달만 따도 마치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것과 크게 대조된다. 이는 선수들의 땀과 노력보다는 성적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한국 엘리트 스포츠 육성정책의 폐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엘리트 선수들을 한데 모아 훈련하는 방식이다. 군대처럼 엄격한 통제 속에서 집중 훈련을 받은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한체육회는 달콤한 메달의 유혹에 빠져 이런 방식을 버리지 못했다. 심지어 국가 스포츠 정책의 무게중심을 생활체육으로 옮기기 위해 대한체육회와 생활체육협의회를 합친 통합 체육회가 출범해 2016년 이기흥 회장이 초대 수장을 맡았지만 엘리트 스포츠 육성정책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사이 선수촌은 폭력과 성폭행의 온상이 됐다. 실제 대한체육회가 한남대학교 산학협력단을 통해 2018년 스포츠 (성)폭력을 실태조사한 결과 국가대표 선수와 지도자들의 폭력 및 성폭행 경험 비율은 각각 3.7%와 1.7%로 나타났다. 특히 성폭행을 당한 국가대표 선수 10명 중 8명이 장소를 진천선수촌으로 지목했을 정도다. 쇼트트랙 심석희가 성폭행을 당한 곳도 바로 진천선수촌이다. 평생 운동밖에 모르고 자란 선수들은 “너 선수생활 그만둘래”라는 지도자의 ‘협박’에 위기감을 느꼈고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 지도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던 셈이다. 여기에 선수촌의 폐쇄성이 한몫 거들었다.

국민대 이대택 체육학부 교수는 “미국 체조 국가대표 주치의 래리 나사르 성추문 사태 때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미국체조협회장 등 체육계 고위 인사들이 한꺼번에 사퇴했다”며 “이는 조직보다 선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선진국의 체육정책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 ‘금메달 못 따면 네가 책임질래’가 아니라 ‘선수가 피해 보면 금메달도 필요없다’로 인식의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태극광장
#생활체육 중심 스포츠 클럽 활성화가 대안

이에 따라 현재의 엘리트 육성책을 버리고 스포츠클럽을 통한 생활체육 활성화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 선진국의 경우 국가대표 선수들은 대부분 지역 밀착형 스포츠 클럽을 통해서 배출되고 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다양한 직업으로 화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일은 스포츠클럽(Sportverein)에 가입돼 생활 스포츠를 즐기는 일반인 규모가 전체 인구 약 8100만명 중 34.3%인 2750만명에 달하며 스포츠클럽은 9만1000여개다. 일본 역시 광역단체에서 종합형 스포츠클럽 운영을 지원하고 스포츠클럽협의회도 구성돼 있다. 특히 스포츠진흥복권(TOTO)의 수익 일부를 스포츠클럽 육성의 재원으로 활용할 정도로 생활체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영국은 스포츠클럽과 지역-학교 연계 사업인 새틀라이트 클럽(Satellite Club)과 이를 지원하는 원스톱 서비스가 구축됐다. 미국은 생활스포츠를 통한 엘리트선수 발굴 시스템의 모범사례다. CODP(Community Olympic Development Program)인데 지역에서 운영 기반을 다진 스포츠클럽에서 우수 선수를 발굴해 메달리스트 배출까지 할 수 있도록 선수 육성 기반 조성을 지원한다. 특히 미국올림픽위원회는 미국 내 NGB(종목 단체)가 보유한 다양한 자원을 CODP 지정 클럽으로 파견해 유소년 교육 및 각종 기술을 지원할 정도다. 이런 시스템을 바탕으로 선진국 선수들은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수업받으면서 방과후에 스포츠 활동을 하는 ‘학생 선수’가 대부분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수업은 등한시하고 집단 합숙하며 훈련에만 몰두하는 ‘선수 학생’이 돼 버렸다. 

선수 숙소
경희대 김도균 체육대학원 교수는 “생활체육과 엘리트 체육이 통폐합됐기 때문에 이제 성적 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미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에 미래는 선수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스포츠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는 16일 국가대표 선수들의 관리와 운영 실태에 대해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선수촌 시설은 물론 선수촌에서 생활하는 선수, 지도자들에 대한 관리·운영 실태 등이 감사 대상이 될 예정이다. 감사원은 규정에 따라 현장 조사를 거친 후 1개월 내에 공익감사 개시 여부를 결정하고, 감사에 착수하면 6개월 내에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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