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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홍익중생, 홍익인간, 홍익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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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1-14 23:29:26 수정 : 2019-01-14 23: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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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담은 홍익인간정신 / 민족문화 계승·발전에 큰 역할 / 시대정신에 반영 등 고민 필요 / 인간과 자연 공생공영 도모를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은 ‘삼국유사(三國遺事)’ 1권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승 일연(一然, 1206∼1289)을 삼국유사의 저자로 알고 있지만 그의 지혜나 도량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또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던 몽고의 침략으로 초토화된 산천과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벌였던 지성인으로서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삼국유사는 책 자체가 바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 조정은 대몽항쟁 중에 불력으로 난을 극복하기 위해 강도(江都: 강화도 수도)에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고, 몽고복속 후 충렬왕 때 유사도 집필됐던 것이다. 일연의 도력은 ‘대장경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주관할 정도였고, 보각국사(普覺國師)와 국존(國尊)이라는 칭호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삼국유사를 판각한 인각사(麟角寺)도 조정으로부터 토지 백경(百頃)을 받아 중건한 것이었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필자는 고향인 경북 의성을 찾을 때마다 도중에 화산(華山)에 둘러싸인 인각사(군위군 고로면)를 종종 둘러보았고, 문필가로서의 첫 호(號)도 ‘화산’으로 했다. 일연이 태어난 경북 경산(慶山)은 원효(元曉)가 태어난 곳과 지척이다. 원효가 삼국통일 후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화쟁론(和諍論)’을 썼다면 일연은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은 당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구산문도회를 개최하는 등 선승(禪僧)으로서의 이름도 높았다. 일연의 불교정신은 ‘경초선(勁草禪)’에서 요약된다. 그가 쓴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1260년)’에 ‘소나 말의 꼴이 되라’는 뜻의 경초선은 가장 낮은 곳에서 민생과 더불어 살아가는 보살행의 실천을 말한다.

선불교의 두타행(頭陀行)은 위로는 신라의 견당승으로 중국 사천지방에서 ‘정중종(淨衆宗)’을 세운 무상선사(無相禪師)로 올라가고, 아래로는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를 지은 김시습(金時習)에게로 이어진다. 당나라 선승 남천보원(南泉普願)의 ‘이류중행(異類中行: 다르고 같은 것을 함께 한다)’과 일연의 ‘경초선’, 김시습이 즐겨 실천한 ‘피모대각(被毛戴角: 털 나고 뿔 달린 말이나 소와 함께 한다)’은 동아시아 선불교 두타행의 화두로 이름이 높다. 조동종은 선종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의 하나로 산천초목도 설법한다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보살행을 역설하고 있다. 일연이 특히 ‘삼국유사’를 쓴 까닭은 ‘조동종’ 종지에 ‘보살행과 애국정신’이 통함을 설한 대목을 받아들인 때문으로 보인다.

홍익인간정신은 실은 일연이 고래의 단군사상을 당대 선불교의 최고의 경지에서 새롭게 규정한 것이다. 대체로 불교의 익생(益生), 혹은 홍익중생(弘益衆生)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연은 몽고의 침략에 직면해 온고지신함으로써 역사의 전통과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유교사관에 의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제외시켰던 신화와 민간설화와 향가를 삽입하고 민생의 삶을 복원하고자 애썼다. 일연의 호국불교정신에 의해 오늘날 우리는 삼국유사에서, 특히 창세신화와 국조신화가 융합된 단군신화를 그 첫머리에서 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제를 거치면서 소위 식민사학자의 수준 낮은 ‘실증사학의 태도’로 신화의 상징적 표현 속에 숨은 역사적 사실과 민족정신을 복원하지 못하고, 오늘날 독자적인 민족·국가사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서기전 2333년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얼마든지 고대국가가 성립된 시기이고, 동아시아의 고대사가 ‘홍산(紅山)문명’의 발굴로 서기전 5000, 6000년까지 소급되고 있는데도 ‘역사로서의 단군’을 평가절하하거나 외면하고 연구를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를 소급하면 어느 나라의 역사이든 신화와 만나게 돼있고, 도리어 역사는 오늘의 ‘살아 있는 신화’로서 후손에 의해 재구성돼야 함에도 사대식민사학에 찌든 학자들은 잘못된 학문인식으로 단군을 외면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단군상 훼손’을 서슴지 않고 있는 반문명적 상황에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정체성 혼란은 근대사관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함에 따른 정신문제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올라가도 정신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정신이 올바로 박혀 있지 않으면 도리어 잘사는 것이 화근이 될 수도 있다. 신화가 없는 민족은 영혼의 상실로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일연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오늘날 우리도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한 대륙전체주의세력들의 패권주의는 몽고제국시절에 못지않고, 유라시아 대륙의 동단에 매달려 있는 자유대한민국을 위협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관과 철학의 정립이 절실한 때이다. 대륙전체주의세력을 극복하는 것은 시대적 과제다. 일연의 ‘홍익인간’과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은 민족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는 홍익인간정신을 어떻게 시대정신에 맞출까를 걱정해야 한다. 요컨대 홍익자연(弘益自然)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공생공영을 도모하는 것은 좋은 방안이라 할 수 있다. ‘홍익자연’은 홍익중생과 홍익인간을 포용하는 미래정신의 가능성이다. 삼국유사와 일연이 그립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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