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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트로 시대’ 남북 군사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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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19 10:19:00 수정 : 2018-12-19 10: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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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을 정리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복고(Retro)가 꼽힌다. 기성세대는 “저렇게 촌스러운 것을 왜 좋아할까?”라고 하지만 젊은 세대는 복고에서 새로움과 설렘, 편안함을 느낀다. 1980~2000년대 영화 재개봉 등으로 시작된 복고 열풍은 밴드 퀸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에 힘입어 뉴트로(new-tro)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인 뉴트로는 옛날 것을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말한다. 복고가 과거의 재현이라면 뉴트로는 과거를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다.

올해 국방 분야에서도 뉴트로의 특성이 엿보이는 사례가 있다. 남북간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군사합의와 4.27 판문점선언, 9월 평양선언에서의 군사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1972년 7.4 공동선언 이후 남북이 채택한 수백개의 합의서들을 모아 현재 사정에 맞게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우면서도 새롭지 않은 ‘뉴트로 합의’다.

우리측 군인들이 12일 중부전선 일대에서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시범철수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북한군 관계자로부터 북한측 GP 철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국방부 제공
◆“좋은 것은 다 모았다. 핵심은 이행”

지난 4월 한 정부 소식통은 판문점 정상회담을 앞두고 4.27 판문점선언의 내용을 묻는 기자에게 “새로운 합의를 꼭 만들 필요는 없다. 남북간에는 이미 수백 개의 합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행”이라고 답했다. ‘새 합의’보다 ‘이행’에 무게가 실린 발언이었다.

이같은 발언은 남북이 지난 9월 채택한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에서 현실화됐다. 군사분야 합의서의 면면을 살펴보면, 1972년 7.4 공동선언 이후 남북간 주요 합의에 등장했던 내용이 많다.

실제로 상호 적대행위 중단과 무력 사용 금지 원칙은 7.4 공동선언 이후 남북 합의에 반드시 포함되는 사안이다. 서해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은 2007년 10.4 정상선언과 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 합의문에 들어있다. 남북 군사당국간 직통전화 개설과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구성 등도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담겨있다. 

남북 군 관계자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감시장비 설치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군사분야 합의서가 기존 남북 합의와 다른 점은 이행 여부다. 남북기본합의서를 비롯해 남북의 군사적 신뢰구축 관련 합의 중 실제로 이행된 것은 2000년 1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개성공단 조성 관련 사항과 2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 개최가 실현된 것 외에는 거의 없다. 남북이 주요 사안에서 합의서를 만들어도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군사분야 합의서는 “이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신속하게 합의 내용이 실행에 옮겨졌다.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시범 철수 △육해공 상호 적대행위중단 구역 설정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한강하구 공동수로 조사 등의 사안이 이행됐다. 내년에 시행될 공동유해발굴과 남북 군사공동위 구성 등을 제외하면 올해 안에 시행해야 할 사안이 이뤄지면서 초기 단계에서의 군사적 신뢰구축은 어느 정도 이뤄졌다는 평가다.


북한군 장병들이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위해 강원 철원군 비무장지대(DMZ) 화살머리고지 일대에 건설한 전술도로에서 작업 및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진전된 디테일 필수

군사분야 합의서를 둘러싸고 예비역 장성들과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안보포기’ 논란이 제기됐지만 정작 국민 다수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9년간 북한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 등 무력도발을 거듭했다. 국민들은 전쟁 공포에 시달렸지만 정부는 국민의 안보불안을 해소하지도, 북한 도발을 저지하지도 못했다. 북한과 미국이 ‘말폭탄’을 주고받고 국제사회의 제재 압박이 강화되면서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긴장이 고조됐지만, 정부는 이를 완화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결과 국민들은 북한에 대한 공포와 함께 한반도의 주인이면서도 한반도 정세를 주도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됐다.

전쟁의 공포를 원하는 국민은 없다. 박근혜정부 시절인 2015년 8월 북한 지뢰 및 포격도발로 야기된 전쟁 위기를 해소한 8.25 남북 고위급 합의가 채택되자 정부 지지율이 상승했던 것이 좋은 예다. 하지만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합의는 백지화되고 한반도 위기 국면은 더욱 심화됐다. 

이같은 국면에서 상호 적대행위 중지 등이 포함된 군사분야 합의서는 북한 도발이 잦아들면서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2000년대 초중반의 한반도 평화 정세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과거에 대한 향수와 연결돼 힘들었던 공포의 시대를 피하는 안식처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에 GP 시범철수 등 실질적인 이행 조치가 이뤄지면서 유명무실했던 기존 합의와는 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을 높였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하면서 국민들의 지지와 공감을 얻은 셈이다.

시범철수 및 파괴 대상에 포함된 중부전선 일대 북한군 GP가 지난달 20일 폭파되고 있다. 국방부 제공
문제는 올해보다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둬야 군사분야 합의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는 GP 폭파 영상을 공개하고 남북 군 관계자들이 GP 철수 상황을 함께 검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내년은 사정이 다르다. 우발적 충돌방지와 초보적 단계의 군사적 신뢰구축을 넘어선 조치가 이뤄져야 국민들의 지지가 지속될 수 있다.

군 안팎에서는 남북 군사공동위의 역할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남북이 팽팽하게 맞설 의제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북 군 당국은 북한 해주 항로 개방, 서해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등 쟁점 사항을 남북 군사공동위에서 협의하기로 했다. 해주 항로 개방은 북한 민간선박의 해주 직항을 허용하는 문제로서 북한은 황해도 해안 지역 개발과 선박 항해 거리 및 소요시간 단축 등을 위해 해주 항로 개방을 요구해왔다. 해주 항로를 개방하게 될 경우 북한 민간선박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지나갈 수 있어 ‘NLL 무력화’ 논란이 재연될 수 있다. 서해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역시 NLL을 둘러싸고 남북 간 갈등이 벌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 군사공동위 논의 주제로 명시한 부분은 더 큰 논란을 야기할 우려도 있다.

우리측 군인들이 12일 중부전선 일대에서 북한 군인들과 함께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시범철수를 검증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
대규모 부대이동과 군사연습 통보 및 통제와 단계적 군비축소 등은 협의 시작단계서부터 남북 간 격론이 불가피한 주제다. 실행력을 담보하기 위해 남북 군 당국이 서로의 전력증강 계획과 군비 규모 등을 파악해야 하는데, 상호 신뢰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보공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군사분야 합의서 이행 자체가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다. 북한의 주장을 검증할 방법을 찾는 것도 난제다. 논의 과정에서 ‘디테일의 싸움’이 불가피한 대목이다. 군 당국간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남북 정상간 담판에 의한 문제 해결을 시도할 가능성도 있지만 실무진들의 협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남북간 군사적 신뢰구축과 긴장완화 조치의 경우 지금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경험했던 과정을 밟아왔다. 하지만 남북 군사공동위 구성 및 운영 단계서부터는 참고할만한 전례가 거의 없다.

유럽 등 제3국과의 군비통제 경험을 갖고 있으나 군사정보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은 북한을 상대로 하는 협상은 유럽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북한은 한 분야에서 10~20년 이상 근무해 전문성을 쌓은 인재들이 포진해있다. 우리 군이 인재 풀이나 물적 자원이 풍부하다고 하나 조금만 방심하면 북한이 파고들 빈틈을 드러낼 수 있다. 과거를 새롭게 해석한 ‘뉴트로’식 군사분야 합의를 내년에도 유지하기 위한 ‘디테일’ 싸움이 국방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2019년을 맞는 국방부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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