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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이겼지만 아직 혼자 싸우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 고발 그녀의 외침 [後 스토리]

입력 : 2018-11-24 12:00:00 수정 : 2018-11-24 15: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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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희롱 고발, 그 후 5년

 

“여전히 동료들과 소통이 없습니다. 회사 안에서 혼자 싸우고 있습니다.”

2012년 초부터 1년여간 직장 상사로부터 성희롱에 시달린 뒤 아직 재직 중인 대기업 과장 박모씨 측의 외로운 외침이다.

당시 그녀는 회사에 자신의 성희롱 피해를 알렸지만 회사는 되레 인사 불이익 등 2차 가해를 가했다. 그녀는 이후 4년 넘게 치열한 법적다툼을 벌여야 했다. 지난 4월 재판부는 박씨의 손을 들어 회사에게 4000만원을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사측이 성희롱 피해자에게 부당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남녀고용평등법’이 인정된 대표적인 사례가 됐고, 여성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박씨의 삶은 이후 달라졌을까? 박씨가 여전히 회사 내에서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세계일보에 전해졌다.

◆재판에 승리했지만…외로운 싸움 이어져

박씨를 대변해 온 ‘민주노총 법률원’ 이종희 변호사는 22일 통화에서 “업무에 대해 불이익은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동료들과 소통이 제대로 되거나 정보를 받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박씨와 함께 싸워온 한국여성민우회 달래 활동가도 이날 통화에서 “판결 이후 회사 안에서 위치가 달라졌거나 불이익이 끊긴 건 아니다”며 “소송이 진행 중일 때는 회사가 더 심한 불이익을 못 줄 거란 기대가 있었지만 소송이 끝난 후에는 회사에서 어떻게 할지 모르는 거라 혼자 싸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해자가 회사를 떠났지만 박씨를 돕던 직원도 회사를 떠났고 안 좋은 소문을 퍼트렸던 직원들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즉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판결에서 승리했지만 회사에 남은 피해자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박씨의 4년 간 민사소송은 끝났지만 회사 측의 형사소송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 “편견, 소문, 징계” 회사 내 ‘2차 가해’의 두려움

박씨의 고통은 2012년 최모씨가 새로운 팀장으로 오면서 시작됐다. 유부남이었던 최씨는 박씨에게 “아로마 오일을 쫙 발라서 전신마사지를 해주겠다” “집에 차로 태워주겠다. 저녁을 함께 먹자” 등 개인적인 만남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한 회식자리에서 최씨는 박씨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넸고 산행에서 손을 잡는 등 신체적 접촉을 했다. 박씨는 최씨에게 거듭 불편함을 호소했지만 성희롱은 1년여 간 지속됐다. 퇴사까지 생각한 박씨는 회사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회사에선 되레 ‘2차가해’가 발생했다. 사건을 조사한 인사팀 직원들이 “박씨가 보통 아닌 여자다”, “박씨도 (성희롱 상황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거다” 등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한 임원은 박씨에게 “회사를 나가는 것이 깔끔하다”고 사직을 권고하기도 했다.

가해자 최씨는 정직 2개월 처분을 받았지만 피해자 박씨는 회사로부터 점점 고립됐다. 연구직이었던 박씨는 일반사무직으로 보직 변경됐고,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는 이유로 징계가 내려졌다. 박씨를 돕던 동료와 소송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기밀문서를 빼돌렸다’고 회사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부원들은 박씨에게 업무를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고, 인사고과는 낮게 부여됐다. 당시 임신 중이던 박씨를 돕던 동료는 육아휴직 후 회사를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가해 회사의 직원으로 있으면서 수년간 외로운 법정 싸움을 이어갔고 재판부는 회사의 2차 가해를 인정했다.

◆여전한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57% 문제제기 후 불이익 당해”

이 변호사는 박씨의 판결에 대해 “남녀고용평등법상 불이익 조항에 대해 기존 법원에서 판시한 적이 없는데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남녀고용평등법 14조에 따르면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재판부는 당시 박씨가 입은 불이익 조치에 대해 명목적 사유가 아닌 실질적 피해를 들어 판단했고, 이후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나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연락이 많았다는 게 이 변호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여전히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제기 후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서울여성노동자회의 ‘2016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3명 중 57%가 ‘성희롱 문제제기 후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회사로부터 ‘파면, 해임, 그밖에 신분상실에 해당하는 불이익 조치(53.4%)’, ‘집단 따돌림, 폭행 등 폭언, 그밖에 신체정신적 손상(53.4%)’ 등의 불이익을 입었다고 꼽았다. 직장 내 성희롱 발생 후 피해자 72%는 해당 회사를 퇴사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시스템부터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직장 내에 성희롱을 처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한국여성노동자회 배진경 공동대표는 22일 통화에서 “피해자가 일상에 복구하고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등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피해자가 침묵하지 않을 수 있다”며 “직장 내 성희롱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은 사업자들에게 의무로 주어진 것인데 우리나라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실상”이라고 꼬집었다.

배 대표는 이어 “전체가 다 아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혼자 얘기를 해야 하는 사안인 만큼 주변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하다”며 “누군가가 자신의 피해를 얘기했을 때 경청하고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같이 찾아가는 문화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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