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 불발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무역정책이었다. 개최국인 파푸아뉴기니의 피터 오닐 총리는 이날 폐막 기자회견에서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을 둘러싸고 정상들 간 의견이 맞지 않았다고 밝혔다. 누가 공동성명에 반대했느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오닐 총리는 “그 방의 ‘두 거인’을 알지 않느냐”고 답하며 미국과 중국을 지목했다. 각국 정상들은 이틀간 일정으로 열리는 에이펙 정상회의 마지막 날에 공동성명을 발표해 온 관례를 깨고, 의장성명을 대신 내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펜스 부통령과 시 주석은 양보 없는 설전을 벌였다. 시 주석이 17일 에이펙 최고경영자(CEO) 포럼에서 먼저 연단에 섰다. 시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통상정책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고 AP통신 등이 전했다. 시 주석은 “냉전이든 열전이든, 또는 무역전쟁의 형태이든 대결에서 승자가 없다는 점을 역사가 증명한다”면서 “보호주의와 일방주의에 ‘노’(No)라고 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의 통상정책에 대해서는 “근시안적 접근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시 주석은 “규칙은 국제사회가 함께 제정해야지 누구의 팔뚝이 굵고 힘이 세다고 해서 그가 말한 대로 되는 게 아니다”면서 “스스로 문을 닫으면 세계를 잃고, 끝내는 자신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에 경고했다.
펜스 부통령이 반격에 나섰다. 펜스 부통령은 “우리가 중국 상품에 2500억달러(약 283조원)의 관세를 물리고 있으나 관세 규모가 2배 이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펜스 부통령은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국이 행로를 바꿀 때까지 미국은 행로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펜스 부통령은 시 주석이 추진하고 있는 신경제구상인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정책이 일방통행식 정책으로 ‘수축 벨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일대일로 정책에 따라 중국의 차관을 받아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나선 국가들이 빚더미에 짓눌리거나 그 시설의 운영권을 중국에 넘기는 사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이날 펜스 부통령이 중국의 공세에 강력하게 대응하려고 연설 직전까지 원고를 계속 수정했다고 전했다. 펜스 부통령과 시 주석은 이번 회의에서 회동하지 않았으며, 시 주석이 오닐 대통령 옆에서 사진촬영을 할 때 펜스 부통령은 아예 촬영장을 떠났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