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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점령군은 애초 조만식을 낙점했었다”

입력 : 2018-11-03 03:00:00 수정 : 2018-11-02 19: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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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8월 9일 소련 참전 蘇·日전쟁부터/김일성 등장까지 67일간 北 혼란상 담아/蘇, 8월15일 日 패망으로 싱겁게 北 입성/
당시 마땅한 통치 원칙없어 세력다툼 치열/두달 만에 여운형·조만식·박헌영 등 제치고/소련군 대위 김일성, 평양 연설로 1인자에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지음/한울아카데미/2만5000원
김일성 이전의 북한/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지음/한울아카데미/2만5000원


“후보자가 3명이었는데, 조만식 박헌영 김일성이었어요. 처음엔 아마 조만식이 제일 좋은 후보자였지요. 나는 경무사령부(소련25군 북한 통치부서) 부경무관 브롯코 중령과 함께 조만식을 세 번 찾아갔어요. 우리와 협력하자고 설득했는데 그는 결사 반대했죠. (소련 외교관과 정보원들은)박헌영을 추천했어요. 능력 있는 국제공산당 일꾼이었고, 좋은 정치인과 유능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어요. 반대로 로마넨코, 시트코프 등 장군들은 (김일성이)소련군 대위여서 자신들 사람이라고 보았고 결국 장군파가 이겼어요. 애초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울 생각이 없었다고 확신해요. 만일 처음부터 내세울 계획이었다면 대위보다 훨씬 높은 계급도 부여했겠죠. 김일성 스스로 열심히 인맥을 만들고 신임을 받기 위해 노력했어요.”

김일성대대(88여단 1대대) 통역관으로, 1945년 9월 19일 소련군함을 타고 김일성과 원산으로 입북한 유성철의 증언이다. 인민군 고위직을 지낸 유성철은 1958년 소련파 숙청 당시 쫓겨났다. 김일성의 실체에 대해 지금도 정설이 없다. 신뢰할 만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이 책에는 김일성 정권 탄생과 관련한 가장 최근 연구 성과가 담겼다. 러시아 소장학자인 저자는 소련의 1차 자료와 당시 사람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소련점령군이 김일성을 선택한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유성철의 증언은 국내 처음 공개됐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김일성 옆에 서 있는 장교는 미하일 칸 소령(소련국적 조선인)이고, 뒤쪽에 소련군 장군들이 서 있다. 오른쪽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그리고 소련점령군 사령관 이반 치스탸코프 상장.
출처:‘8·15 해방일주년기렴. 북조선민주주의건설사진첩’
1945년 8월 9일 소련군 참전부터 김일성 등장까지 67일의 짧은 기간 북한은 혼란 그 자체였다. 평양의 조선총독부 체제는 무너졌고 그야말로 북한 정세는 예측불허 상황이었다. 저자는 “그러나 이 시기는 향후 북한 현대사를 결정한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었다”고 단언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1945년 8월 소련 참전부터 시작된다. 1941년 소련과 일본은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소련은 8월 8일 선전포고를 했고, 바로 다음날 일본을 공격했다. 미국과 영국은 자국군의 피해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소련 참전을 종용했다. 저자는 이를 ‘소일전쟁’이라고 했지만 전쟁으로 이름 붙이기는 애매하다. 북조선 주둔 일본군의 저항은 미미했기 때문이다. 평양을 북 수도로 정한 것도 소련점령군이었다. 사령관 치스탸코프 상장은 평양 또는 함흥을 군사령부 위치로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단 하루 만에 평양을 선택했다.

1945년 9월 하순까지 소련 당국은 북한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당시 여운형,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 박헌영 등 남로당 세력, 허가이 등 연안파 세력은 열성적으로 정권잡기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모든 세력은 불과 두 달여 만에 정치무대에서 쫓겨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북한 현대사의 수수께끼는 김일성 등장 과정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극동전선의 소련25군은 조선인 중심의 88여단을 창설했고, 1대대장이 김일성이었다. 소련군 이전의 김일성에 대한 평가나 증언은 사람마다 엇갈린다. 소련군 대위로 귀국한 직후 김일성의 첫 직함은 소련25군 경무사령부 부관이었다. 그는 10월 14일 평양 연설을 기해 북한의 국가 원수로 올라선다. 그러나 1945년 당시에도 김일성의 위치는 임시적이었다. 1946년 소련은 미국에 여운형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 통일정부를 설립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여운형 제안설’은 미국을 속이기 위한 스탈린의 연막전술일 가능성이 높다.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최종 확인된 것은 1949년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한다. “당시 소련점령군 사령관 치스탸코프 상장(소장)을 비롯한 군인들은 (괴뢰정권 앞잡이로) 김일성을 눈여겨보았고, 김일성을 베리야(비밀경찰 책임자)에게 천거했으며, 베리야는 스탈린의 승인을 얻었다.” 소련은 일본군 토벌을 피해 만주에서 도피해 온 항일빨치산을 통합해 1942년 7월 21일 88독립보병여단을 편성했다.

미하일 칸 소령(왼쪽)과 메클레르 중령(오른쪽)이 붉은 기 훈장을 받은 김일성 대위를 축하하고 있다. 해맑은 미소를 짓는 김일성의 표정이 이색적이다.
출처:메클레르 개인 소장
특히 38선 분할 결정은 졸속 조치 그 자체였다. 서울 미군정 소속 미군 대령 2명은 소련군의 급속한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다.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중간선인 38도선을 저지선으로 설정한 것. 단 30분 만의 결정이었다. 이어 38도선 이북을 소련이, 이남을 미군이 점령하자고 소련에 제의했다. 애초 평양과 원산의 40도선 분할 논의가 있었으나, 스탈린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우려해 접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38선 부근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저자는 “애초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할 속셈이었던 스탈린이 의외로 빨리 분할 제안을 수락한 것은 수수께끼”라고 했다.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들의 만행을 있는 그대로 보고한 소련군 장교의 보고서도 주목된다. 저자는 “표도로프와 립시츠 대령은 붉은 군대의 약탈, 만행, 부녀자 폭행, 굶어죽는 일본인에 대한 쌀 배급을 거부한 치스탸코프 사령관 등에 대해 보고했다”면서 “자신보다 훨씬 높은 권력자의 잔혹한 정책에 대해 용감하게 진실을 밝혀 무고한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전했다. 스탈린이 지배하는 당시 소련은 공포체제였고 공포체제를 거스르는 보고는 거의 반역이었으나, 두 장교는 북한의 실상을 보고해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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