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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小食)은 일본 번영의 비결”…조선통신사들이 관찰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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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0-29 03:00:00 수정 : 2018-10-28 1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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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전남 목포의 바다에 조선통신사선이 떴다. 임진왜란 후인 1607년(선조 40년) 처음 통신사 파견이 재개됐고, 1811년(순조 11년) 12번째가 마지막이었으니 200여 년만이다. 1년 정도가 걸리는 왕복 4000㎞의 여정, 목숨을 걸어야 할 지도 모를 험한 바다를 건넌 통신사들은 조일 양국 교류를 이끌었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사진=연합뉴스
일본에 건너간 조선의 외교관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최근에 나온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는 “사절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무사가 지배하는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임진왜란으로 생긴 적대감과 그것이 옅어지는 과정과 계기, 오랑캐로 무시하던 일본, 일본인에 대한 복합적 시선, 외국문물을 접하면서도 자기들만의 시각에 갇힌 조선 지식인의 아집 등을 포착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를 미워하니 재침략은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 7년 전쟁으로 일본은 조선에게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의 기억은 옅어지고, 교류가 확대되면서 일본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변화의 큰 계기 중 하나가 전쟁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일본인들의 원망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일본인 역시 히데요시를 미워한다는 사실에서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히데요시가 망하자 왜인들도 이를 지극한 훈계로 삼아 그 뿌리박힌 독한 풍속이 점차 변화하였다.…히데요시를 꾸짖어 ‘풍적’이라 부르며, 전쟁을 그만두고 점차 문교(文敎)를 숭상하게 되니…”

1711년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쇼군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임수간이 기록한 내용이다. 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한 홍경해는 “전쟁을 일삼아 무력을 남용하여 죄없는 이를 많이 죽였기 때문에 하늘의 도가 매우 밝아서 지금은 후손이 없습니다”라며 히데요시에 대한 한 일본 문인의 평가를 전했다.

이는 감정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아 일본의 재침략 가능성을 낮게 보는 ‘정책적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히데요시에 대한 원한을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이 평화를 유지하는 정신적 토대로 본 것이다. 정사(正使·통신사의 우두머리)로 일본에 다녀온 홍치중은 숙종을 만나 히데요시를 미워하는 일본인에 대해 언급하며 “인심이 이와 같고 그 나라 안의 위아래가 서로 협력하여 또한 변란이 없으니, 우선은 우려할 만한 일이 없을 것”이라며 재침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밥상을 받은 조선인의 모습
◆적게 먹는 게 일본 풍요의 비결

‘대식가 조선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종종 언급되는 사진이다. 다 먹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식사량은 일본을 풍속을 바라보는 한 포인트였다. 특히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들이 훨씬 적게 먹는 것을 번영의 토대로 보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통신사들은 일본을 사치스러운 풍조에 오염된 나라로 평가했다. 특히 거슬려 했던 게 사찰과 저택이었다. 오사카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에도의 혼세이지(本誓寺) 등과 주요 대도시의 ‘부께 야시키’(무사들이 거주하는 저택)가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보며 “성품이 사치하기를 좋아한다”, “습속이 사치함을 숭상하여서 층층 누각과 채색한 정자가 강물 위로 비쳤다” 등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백성들의 조용하고 검소한 생활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 근거 중의 일본인의 소식(小食)이었다. 이경직은 “밥은 두어홉에 불과하고 찬도 두어가지에 불과했다”고 전했고, 남옥은 “가마꾼이…먹는 것을 보면 몇 잔의 술과 몇 홉의 밥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보건대 음식에 대해 절도가 없는 것은 우리나라만 한 곳이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홍치중은 일본이 부유하게 된 비결을 검소한 생활에서 찾으며 소식을 언급했다. 그는 “그들의 부강하고 풍요로운 방도를 탐구해 보니…단지 간약(簡約)을 위주로 삼았다.…음식은 조그마한 그릇에 담아서 먹되 먹는 것도 적었다”고 말했다.

검소함을 이상적인 생활양식으로 여겼던 조선사회에서 소식은 유교 생활철학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끼니 걱정은 면하고 살았을 지배층의 일원인 통신사들이 배불리 먹고 살게 할 방도를 찾는 데는 관심이 없고, 생활의 절도 운운하며 백성들의 식생활을 비판한 것은 외국의 문물에 대한 경험을 성찰과 발전의 계기로 삼지 못한 그들의 아집과 독선을 떠올리게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
◆“통신사들은 글씨는 복을 내린다” vs “한시 교류 폐지하자”

통신사의 파견은 문화교류를 낳았다. 얼굴을 맞댄 양국의 지식인들이 나눈 글과 그림은 지금도 전해져 조일 양국의 평화시대를 상징한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기록물’ 111건 333점 중 문화교류기록은 41건 146점으로 외교기록(5건 51점), 여정기록(65건 136점)보다 많다.

조선 지식인들의 글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망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유한은 “문사라고 하는 자는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와서 역참이나 관소에서 기다려서 하룻밤 사이에 종이 수백폭을 썼다”고 적었다. 오대령도 “일본인은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를 얻어 벽에 붙이면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내린다고 한다”라며 통신사들의 글이 부적처럼 쓰이는 사실까지 전했다.

문화적 교류가 양적, 질적으로 나아지다보니 일본인을 오랑캐로만 여겼던 조선의 인식은 조금씩 변화를 보였다. 원중거는 “사신 일행이 저들을 대할 때에는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참으로 그에 걸맞는 예로써 대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인과의 교류에 유교적 예절을 강조한 것은 일본인을 같은 윤리규범을 공유하는 존재로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자를 매개로 한 교류가 워낙에 많은 것에 불만도 있었다. 무엇보다 찾아온 이들을 응대할 수밖에 없어 급하게 쓴 글들이 책으로 엮여 전해지는 데 거부감이 있었다. 남옥은 일본에서의 한시 수창을 폐지할 것을 제안하며 급하게 써 수준이 낮은 글에 대한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잠깐 사이에 10편을 써내고 혹은 하루에도 종이 100장을 넘기기까지 하니…민첩한 솜씨라도 어찌 다 일일이 글을 이룰 수 있겠는가? 풍속이 다른 이국에 우리의 추함을 드러내서 영원히 비웃음을 전하게 하니, 나라를 빛나게 하고자 한 것이 도리어 나라를 욕되게 한 셈이 되고 재주를 과시하고자 한 것이 도리어 재주를 더럽히게 된 셈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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