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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의 미학, 분청사기에 빠지다

입력 : 2018-10-23 03:00:00 수정 : 2018-10-22 20: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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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쓱쓱 문지르는 ‘귀얄기법’/도공의 붓놀림을 고스란히 담아내/자연과 같은 꾸미지 않은 문양 연출 ‘귀얄’은 붓이다. 백토를 귀얄에 묻혀 도자기 몸통에 손가는 대로 쓱쓱 문질러 나타나는 문양을 그대로 선택한 것이 분청사기 귀얄기법이다. ‘덤벙’은 물건을 물에 빠뜨리는 모습 혹은 소리를 묘사한 단어다. 분청사기 덤벙기법은 백토물에 도자기를 담갔다 꺼내면 끝이다. 백토물이 물들고 흘러내린 그대로 도자기를 꾸민다.

귀얄이든 덤벙이든 도공에게 계획된 미감이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귀얄이 아무렇게나 지나간 흔적이, 백토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분청사기의 무늬다. 심지어 도공의 손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고려의 청자에서 조선의 백자로 넘어가던 14∼16세기, 분청사기는 약 150년 동안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했다. 귀얄과 덤벙도 그중 하나다. 제도적인 간섭을 받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사용할 수 있도록 대량생산되다 보니 창출된 양식이다. 귀얄, 덤벙의 분청사기를 보면 도공들이 의식한 미감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분청사기의 이런 면모는 생동하는 서민적 감각으로, 현대적인 미의식으로 평가받는다.

호림박물관이 귀얄, 덤벙기법의 분청사기만을 모아 특별전 ‘자연의 빛깔을 담은 분청-귀얄과 덤벙’을 내년 2월까지 연다. 소장품 중 귀얄과 덤벙으로 만든 분청사기 70여점을 골랐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작가 9명의 분청작품 50여점을 모아 수백년 전의 전통이 현대에 어떻게 이해되고 활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어 더욱 흥미롭다. 

호림박물관이 귀얄, 덤벙의 기법으로 만든 분청사기를 모아 특별전 ‘자연의 빛깔을 담은 분청’을 열고 있다. 분청사기는 원초적인 한국적 아름다움이 가장 신선하게 표현된 것으로 평가된다.
호림박물관 제공
문화재 전시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출품작 각각에 대한 설명문을 달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박물관은 “귀얄과 덤벙기법이 지닌 미학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며 관람객들의 자유로운 감상을 유도하려 한다. 그래도 분청사기의 미감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알아둔다면 관람에 참고가 된다.

분청사기는 “원초적인 한국의 아름다움이 가장 신선하게 표현된 도자기”, “무심하면서도 은근한 자연미를 담은 서민적 정서” 등으로 종종 평가된다. 좀 더 고상하게 “무위자연 사상과 맞닿아 있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귀얄과 덤벙기법에서 두드러지는 꾸미지 않은 문양, 기교 없는 기법을 ‘무위’라는 철학적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전시회에 나온 분청사기를 보면 어떤 의미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15세기 후반의 작품인 귀얄문합은 아무렇게나 휘두른 귀얄의 흔적이 어지럽다. 덤벙문호는 몸통의 3분의 2 정도만 백토물에 담갔을 뿐이다. 유약이 흘러내려 뭉친 것이 그대로 문양이고 붓질을 하다 만 듯한 것도 있다. 박물관 서지민 학예연구사는 “도공의 붓놀림에서 운동감과 스피드를 느낄 수 있고, 덤벙기법은 무심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며 “이런 미감은 현대적 추상과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전통 분청사기에서 현대의 작가들이 찾아낸 것은 ‘자유와 자연’이다. 백토가 흘러내린 자국이 도드라지는 윤광조 작가의 ‘산중일기’, 백토 위에 나뭇잎을 붙여 무늬를 꾸민 변승훈 작가의 ‘대지의 노래-뚱딴지’, 귀얄의 거친 선이 역동적인 정재효 작가의 ‘분청사기귀얄사각발’ 등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변승훈 작가는 “분청은 우리나라가 나에게 준 축복”이라며 “그 활기에 찬 소박함을 나는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박성욱 작가는 “분과 불길의 움직임을 담아내면서도 담담하게 그 빛을 지켜내는 백색의 매력을 나는 덤벙분청에서 찾는다”고 털어놓았다. 최성재 작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백토분장의 부드러운 물성에 이끌려 미지의 상들을 찾아나간다. … 촉촉이 물기 어린 분장의 행위는 자연을 머금은 마음의 풍경을 찾아 여행을 한다”고 말했다.

특별전 관람을 끝내면 도자기 컬렉션이 강점인 호림의 명품 도자기를 엄선한 4층 전시실을 찾아 눈호강을 해보는 것도 좋다. 국보 179호 ‘분청사기 박지연화어문 편병’, 보물 1068호 ‘분청사기 상감모란당초문 유개항아리’, 보물 1456호 ‘분청사기 박지태극문 편병’ 등을 만날 수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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