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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게도 사랑과 욕망이… ‘실버 판타지’

입력 : 2018-10-19 03:00:00 수정 : 2018-10-18 21: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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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원 장편소설 ‘도깨비와 춤을’ 펴내/작가 자신의 분신과 대화를 나누며/ 노년의 삶 돌아보는 형식으로 전개/“노인에게 성적 사생활 있을 수 있나/
고독·우울증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영원한 청춘은 없고 끝자락은 노인”/ 인생 의미·삶·죽음에 대한 철학 담겨
“노인답게 고고한 도락을 즐기며 삶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그리할 에너지를 무엇에서 어떻게 얻는가. 노인에게도 성적인 사생활이 있을 수 있는가. 소외로 인한 노인성 우울증과 고독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추한 죽음과 아름다운 죽음은 어떤 모양새인가.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과 초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가 한승원(79)이 노년의 사랑과 죽음에 관해 성찰한 장편소설을 펴냈다. ‘도깨비와 춤을’(위즈덤하우스)이 그것인데, 작가 자신의 분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노년의 삶을 돌아보는 형식이다. 현실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노년의 행복 찾기에 관한 판타지에 가깝지만, 욕망에 대한 솔직한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철학이 깊다. 

북을 잡고 노래를 부르는 근년의 한승원. 그의 예술적 광기를 부추기는 분신인 ‘도깨비’는 여전히 젊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한승원은 음유시인 한승원을 어느 시 낭송회 자리에서 만났다. 시인 한승원은 생김새도 소설가 자신과 똑같고 이름조차 같았다. 현실의 소설가 한승원은 서울에 살다가 해남으로 내려와 소설을 써왔다. 시인 한승원도 그이와 마찬가지로 낙향해 남해군 창선도 지족 마을 남향 언덕에 집을 짓고 산다. 그이가 소설가인 자신과 다른 점은 눈빛뿐이었다. 그이의 눈에는 ‘짝 잃은 늙은 수컷 노루의 눈빛 같은 처연함’이 보였다. 소설가 한승원은 그이를 만난 것을 두고 “우리 두 사람이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찾아내려고 신이 대면하게 해준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음유시인 한승원의 눈빛이 결핍으로 가득한 이유는 아내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상실의 한가운데에서 어떻게 다시 생기를 회복하고 생의 마지막을 향해 어떤 자세로 나아가는지, 소설가 한승원에게 내내 설명하는 과정이 이 장편의 중심축이다. 실제로 소설가 한승원은 시집을 6권이나 상재한 시인이기도 하다. 결국 자신의 욕망을 분신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토로하는 셈이다. 그 분신은 수시로 한승원이 썼던 시를 인용한다. 

1990년대의 젊은 한승원
음유시인 한승원은 또 다른 분신인 ‘도깨비’를 거느리고 있다. 그가 ‘도씨’라고 부르는 도깨비는 광기를 부추긴다. 자신의 영혼을 도깨비에게 저당 잡힌 대신 남해의 바다를 포함한 자연을 자신의 것으로 누린다. 자연과 더불어 시를 쓰고 주저하고 낙망하면서도 몸에 깃든 욕망을 서서히 실현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아내를 잃은 그이에게 누드모델이 찾아와 ‘몸 공연’을 벌이고, 이어서 붉은 철쭉을 닮은 여성이 등장해 그이와 몸을 나눈다. 그 여성을 떠나보낸 뒤에는 나리꽃을 닮은 여인이 나타나 종국에는 죽음을 같이 맞기로 언약하고 노년의 순간들을 충일하고 황홀하게 살아낸다.

그는 “남녀 간에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깜깜한 허무의 바다를 외로운 등불 하나 밝히고 건너가기와 다름없는 거”라면서 “서로의 몸에서 신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야합이며, 신성한 사랑 행위는 서로를 위안하고 치유하는 구원이고 신의 뜻”이라고 설파한다. 노년에도 몸으로 사랑을 나누는 황홀경이 외설스럽지 않게 시처럼 흐른다. 

소설가 한승원이 북구나 바이칼호수를 다녀오는 패키지여행에서 그이를 만나 이야기를 듣는 과정으로 이 사연들은 전개된다. 음유시인 한승원은 “제 도씨는 저보다 늘 한참 젊게, 십 년 이십 년은 더 젊게 사는 놈”이라고 말하고, 소설가 한승원은 “나에게 도깨비는 내 자존심의 한 표상이고, 나의 고독을 이겨내게 해주는 반항적인 그림자”라고 기술한다. 두 사람은 거울 앞에 마주 선 같은 사람이다.

현실의 소설가 한승원은 “노인은 건조하게 살다가 막판에 고려장이 되듯 어두운 곳에 유폐됐다가 폐기처분돼야 하고, 다만 죽음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여야 하는가”라고 묻고, “영원한 청춘은 없고 이 책을 손에 든 당신도 당신 삶의 끝자락에서 노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자답한다. 그는 “이 소설은 나의 참모습 찾기와 다름없다”면서 “글을 쓰는 일은 우주의 율동, 자연의 섭리 혹은 신의 뜻을 깊이 읽어 독자들에게 누설하는 것, 천기누설일 터”라고 후기에 썼다. 이번 장편은 팔순에 이른 소설가 한승원이 작심하고 쓴 ‘실버 판타지’라 할 만하다. 노인을 위한 문학은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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