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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신부가 쓴 국내 첫 양봉교재, 獨 수도원서 긴 잠 깨다 [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입력 : 2018-10-16 10:00:00 수정 : 2018-10-15 2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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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0년 만에 돌아온 ‘양봉요지’ 독일 성베네딕도회에서 우리 문화재 반환이 시작된 것은 2005년 ‘겸재정선화첩’부터였다. 당시 화첩을 돌려주며 했던 말은 베네딕도회의 한국에 대한 애정과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뭔가를 주려면 기꺼이 줘야 합니다. 화첩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올해 1월 베네딕도회는 또 다른 귀중한 문화재를 돌려주며 110여 년간 이어진 이 수도회의 한국에 대한 우정과 신뢰를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독일인 신부가 한글로 제작한 ‘양봉요지’(養蜂要誌)의 반환이다.

벌판을 든 구걸근 신부 독일인으로 일제강점기에 선교를 위해 한국에 들어온 구걸근 신부가 서울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벌판을 들고 있다. 그가 1918년에 쓴 ‘양봉요지’는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양봉 기술이 시작될 무렵의 상황을 보여준다.
양봉요지는 카니시우스 퀴겔겐(Canisius Kugelgen·한국명 구걸근·具傑根, 1884∼1964) 신부가 1918년에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위치한 성베네딕도 수도원(가톨릭대학교 자리)에서 쓴 책이다. 100년 전 한국의 근대 서양 양봉기술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유일본이라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와 의미가 매우 큰 근대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한·독교류 100년의 역사가 서린 귀중한 상징물’로서 현지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책이다.

양봉요지가 비장되어 있던 곳은 독일 바이에른주 슈바르자흐 암 마인에 위치한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 지난 1월 17일, 이 수도원에서 반환식을 거행한 뒤에 한국으로 돌아와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수도원에 소장됐다. 환수를 주도한 박현동 왜관수도원 아빠스(수도원장)는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의 수도원인 왜관수도원과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 간의 오랜 협력의 결실”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은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의 수배를 피해 1920년 독일로 망명했던 이미륵(본명 이의경,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을 8개월간 품어 주었던 곳이다. 이런 호의와 애정은 양봉요지를 만들고, 반환을 이끌었던 두 독일인 신부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어 더욱 뜻깊다. 

양봉요지 올해 1월 독일의 성베네딕도회에서 영구대여 형식으로 돌아온 ‘양봉요지’.
◆한국 근대 양봉의 선구자, 구걸근 신부

1900년대 초에 유럽의 서양종 꿀벌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서양식 근대 양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며칠 전 현익현(독일명 ‘바르톨로메오 헤네켄’) 왜관수도원 신부가 1916년부터 구걸근 신부가 유럽 꿀벌을 키웠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알려주었는데, 이 내용이 성베네딕도 수도원(이하 백동수도원) 1920년 연대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1916년에 7월 16일 일본인 도미타이가 수도원에 유럽 꿀벌 소초(육각형 벌방들의 형태를 이룬 얇은 판) 두 개를 선물했다. 이 전에 길렀던 토종벌과는 달리 급속도로 발전하여, 그해 말에는 소초가 14개로 구성된 하이브(가동식 소광을 넣을 수 있는 벌통) 3개가 되었으며, 1917년에는 그 수가 10배 이상이 되었다.”

원심분리기 독일 호헨하임 인 뷔르템부르크 농업전문대학교에서 원심분리기 등 양봉도구를 이용해 수업하는 모습. 양봉요지에는 근대 양봉의 3대 요소인 벌통, 소초, 원심분리기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왜관수도원 제공
우리나라의 유럽 양봉 최초 도입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양봉연구가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구걸근 신부는 양봉지침서인 ‘실험양봉’(1917년)을 쓴 윤신영과 함께 한국 근대 양봉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다른 정보는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 60주년 기념집 출판물인 ‘HWAN GAB’(1973년)에 실린 양봉요지에 대한 설명이다.

“카니시우스 퀴겔겐, ‘양봉요지’, 1918년, 150부, 등사판. 이 글은 직접적인 선교물로 간주할 수 없지만 여기에 언급하고자 한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고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이 끊기게 되자 카니시우스는 1916년부터 선교의 금전적인 지원금 확보를 위한 고성능 양봉사업의 설립과 운영에 성공을 거두었다. 1917년에 그는 양봉 강의를 시작했는데, 항상 만석이었다. 양봉요지는 게르스퉁의 저술 ‘벌과 양봉’(Der Bien und seine Zucht)에 기초를 두었다.”

이런 내용들은 윤신영의 책이 출판되기 1년 전인 1916년부터 구걸근 신부가 유럽 꿀벌을 키웠으며, 1917년에 백동수도원에서 양봉 강습을 하였고, 이듬해 이 내용을 간추려 양봉요지를 발간했다는 근대 양봉의 도입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차미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1팀장
구걸근 신부는 독일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인 1911년 1월 6일에 백동수도원에 파견되어 한국과의 길고, 깊은 인연을 시작했다. 서울(1911∼21년), 만주(1921∼50년), 부산(1953∼55년) 등지에서 지내며 ‘한국 근대 양봉의 선구자’로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00년 전 한국 역사를 담은 귀중한 사진들을 남긴 전문 사진작가이자 최초의 한독사전 편찬자이기도 하다. 현재 상트오틸리엔 수도원 아카이브실에는 그가 찍은 방대한 양의 사진들이 남아 있다. 1915년에는 3000여 개의 한자에 한글 음과 훈을 달고 독일어로 풀이한 ‘요한덕해’(要漢德解·왜관수도원 소장)를 편찬하였다.

◆양봉요지의 존재를 알린 현익현 신부

우리나라에 서양 근대 양봉을 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한동안 양봉요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며 지냈다. 양봉요지를 다시 세상에 알린 이가 한국을 사랑하는 또 다른 독일인, 현익현 신부다. 그는 1966년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1968년 8월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으며 현재 왜관수도원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익현 신부는 같은 성베네딕도회 수도자로서 평소 존경했던 구걸근 신부의 행적과 이 책의 실체에 큰 관심을 가지며 끈질기게 추적했다. 2008년 여름, 휴가를 받아 양봉요지를 찾기 위해 모원인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을 방문했다.

수도원의 도서목록에는 분명히 책 제목이 있었다. 그러나 청구번호가 알려준 서가에는 책이 꽂혀 있지 않았다. 현익현 신부는 사서 담당 수사와 함께 사라진 책을 찾아 수도원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양봉요지가 발견된 곳은 도서관의 귀중본 수장고였다.

현익현 신부가 가져온 복사본으로 2015년 백선기 칠곡군수는 칠곡군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양봉요지 현대역 및 해제’(서종학 교수)와 영인본을 함께 묶어 출판해 책의 존재를 국내에 알렸다.

현익현 신부는 올해로 한국에 온지 50년이 되었다. 태어난 고향보다 살아온 기간이 많은 한국이 더 고향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낙산성당으로 이름이 바뀐 가실성당의 이름을 되찾은 주역이기도 하다. 우리의 옛 건축, 온돌방, 판소리, 민요를 좋아하니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그의 이러한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인식과 노력이 있었기에 양봉요지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적극적인 활용, 환수 전략의 중요한 포인트

양봉요지는 영구대여 방식으로 반환됐다. 박현동 왜관수도원 아빠스가 이를 주도했으며,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칠곡군이 힘을 보태 수도원-국외소재문화재재단-지자체(칠곡군) 간 협업에 의한 새로운 환수의 모범사례를 만들어 냈다.

양봉요지의 귀환은 문화재 환수와 관련하여 참고할 점이 많다. 문화재 환수는 긴 시간과 큰 정성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다. 성베네딕도회 소속의 수도원처럼 신뢰가 돈독한 기관으로부터의 반환이라 할지라도 발견에서 귀환까지 10년이 걸렸다. 세심한 전략을 짜고 소장기관과의 협의가 필요한 이유다.

이번 반환은 양봉요지의 적극적인 국내 활용에 대한 열망과 꾸준한 관심이 큰 역할을 했다. 환자를 앞에 두고 의사들이 처방을 고민하듯이, 문화재가 어디에서 잘 활용될 수 있는지를 놓고 소장기관과 논의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이 좋은 환수 전략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2005년 겸재정선화첩을 돌려주며 베네딕도회에서 “화첩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차미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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