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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 때 평양·압록강 일대 춘하추동 사계절 시로 표현

입력 : 2018-10-06 03:00:00 수정 : 2018-10-05 19: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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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수 지음/이은주 옮김/아카넷/2만원
관서악부 - 평안감사가 보낸 평양에서의 1년/신광수 지음/이은주 옮김/아카넷/2만원


평양은 기자조선 때부터 도읍지였다.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박은식은 “한국 사천년 문물이 실로 이곳에서 발원했다”고 말했다. 고구려 멸망 당시 도읍지였으며, 묘청의난 같은 전쟁과 반란의 역사로 점철된 곳이기도 하다. 중국 사신들이 중국의 ‘강남’에 비견했던, 수려한 풍광을 노래한 곳이 평양이다.

이 책은 평양의 전모를 형상화시킨 연작시로 구성되었다. 조선후기 문신 신광수(1712~1775)가 작고하기 직전 1774년에 쓴 작품이다. 정조 때 번암 채제공이 평안감사로 부임할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청천강과 압록강 일대 춘하추동 사계절을 시로 엮었다. 관서악부의 관서는 평안도 지역을 뜻하며, 악부는 한문학의 한 갈래이다. 시는 평안감사의 성대한 부임행렬과 기생의 점고(點考), 화려한 잔치에서부터 운을 뗀다. 여러 유적을 돌아보면서 고조선, 기자조선, 고구려, 고려의 자취가 남아 있는 평양의 역사를 회고한다.

옮긴이는 “실제 자료인 평양 및 평안도 지도, 평양 읍지 및 관련 문헌을 참고해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 검토했다”면서 “평양은 유명하면서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기대감을 갖게 하는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도시”라고 평했다.

신광수는 1746년에 과거시험 답안에 쓴 ‘관산융마(關山戎馬)’라는 시로 두각을 나타낸 명문장가였다. ‘관산융마’는 평양 교방의 레퍼토리였다. 당시 평양 기생들은 이 시를 읊지 못하면 일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신광수는 1760, 1761년 두 차례 평양에 갔다. 신광수는 문과 급제에 실패하고 아무런 관직도 없어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평양의 풍류를 맛볼 수 없는 빈한한 양반 처지였다. 마치 평안감사가 잔치를 열고 있어 정자에 오르고 싶었으나 참석하는 일이 여간 쉽지 않았다. 이때 감사가 신광수가 명망 있는 선비라는 것을 알아준 덕분에 겨우 말석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시 기생들이 ‘관산융마’를 부르는 것을 보고 신광수가 자신이 쓴 시라고 밝히자, 좌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옮긴이는 이 책을 통해 요즘 인기 있는 평양의 역사적인 내력과 유래, 풍류를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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