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대청마루에 모여 앉아 바리바리 작은 상자에 싸온 음식물을 간이식기에 옮겨 담는다. 화려하거나 값비싼 재료가 아닌 각종 나물과 전, 쇠고기 장조림, 생선구이 등 흔한 식재료를 이용한 찬들이 다소곳이 자기 자리에 놓인다. 남은 빈자리는 곤드레밥과 된장국으로 채운다. 음식이 자리를 찾자 새하얀 한지를 살포시 덮는다. 고운 천으로 곱게 싸매는 이들의 손에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주름이 깊게 파여 있다. 대청마루에서 내려가 마당에 핀 꽃을 딴 뒤 가운데 꽂아 방점을 찍는다.
경북 안동의 종부와 안주인들이 각 집안에 내려오는 반가음식을 활용해 만든 ‘안동다섯고택밥고리’. |
수십년 전만 해도 안사람은 문밖 출입조차 쉽지 않았던 고루함의 대표 지역 경북 안동의 종부와 안주인들이 담장을 넘었다.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던 이들이 담장 밖의 일에도 관여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지역 집안에서야 별일이 아니지만, 안동에서는 종가의 맏며느리인 종부와 집안의 안주인이 바깥일을 한다는 것을 아직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더구나 집안의 내력을 활용해 돈을 버는 활동은 주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러기에 수졸당 동암종택 윤은숙, 정재종택 김영한, 수애당 문정현, 치암고택 장복수, 칠계재 류춘영 등 다섯 안주인들이 각 집안에 내려오는 반가음식을 활용해 내놓은 ‘안동다섯고택밥고리’는 특별하다. ‘서로가’라는 협동조합을 만든 이들의 밥고리 안에는 수백년 이어온 다섯 집안의 내력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밥고리는 도시락의 옛말이다. 담장을 넘은 종부와 안주인들의 이 한 끼처럼 안동에도 낭만이 흐르는 애틋한 사랑 얘기가 있고,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즈넉한 장소가 있다. 도산서원, 병산서원, 하회마을 등 고택들을 둘러보며 옛 현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응태와 ‘원이 엄마’의 순애보를 기려 낙동강 위에 놓은 월영교는 국내 나무 인도교 가운데 가장 길다. 아침엔 강 위에 퍼진 안개로 교각이 사라져 다리가 강 위에 떠 있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
‘나를 데려가 주세요 /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 주세요’
병석에 누워 있던 남편은 유명을 달리한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리움과 원망 등이 섞인 글을 남긴다. 노래 가사나 TV드라마 대사에 나올 법한 얘기 같지만 지금으로부터 430여년 전 저세상으로 남편을 먼저 보낸 아내가 남긴 애절한 순애보다.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이응태와 ‘원이 엄마’의 순애보를 기려 낙동강 위에 놓은 월영교는 국내 나무 인도교 가운데 가장 길다. 밤에는 조명이 더해져 화려함을 더한다. |
‘원이 엄마’가 남긴 이 글은 1988년 경북 안동의 고성 이씨 문중 이응태의 묘를 이장하던 중 관에서 발견됐다. 한글로 쓴 ‘편지’였다. ‘원이 엄마’가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신발인 ‘미투리’와 배냇저고리도 한 벌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지어 환자에게 신기면 병이 완쾌한다는 얘기에 ‘원이 엄마’가 손수 꼬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인의 간절함을 하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응태와 ‘원이 엄마’의 순애보적 사랑을 기려 2003년 낙동강 위에 월영교가 놓였다. 길이 387m에 너비가 3.6m로 국내 나무 인도교 가운데 가장 길다. 다리 가운데에는 월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아무래도 애틋한 사랑얘기는 낮보다는 밤이 더 어울린다. 월영교 역시 낮보다 밤이다. 조명이 더해져 화려함을 더한다. 월영교를 건너면 사랑의 자물쇠와 편지를 넣은 ‘상사병(Love Bottle)’을 거는 거치대가 설치돼 있다. 청춘남녀가 달빛이 비치는 월영교를 건너면 백년해로한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맘때는 일교차로 낙동강에 안개가 자주 낀다. 강 위에 퍼진 안개로 월영교 교각이 사라져 다리가 강 위에 떠 있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출된다.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에 있는 제비원 석불. |
제비원 석불에는 이곳에서 일하던 ‘연이’라는 처녀 얘기가 전해져 온다. 불심이 깊고, 고운 마음씨의 연이를 이웃총각들이 사모했는데, 그중 집은 부유했지만 다른 사람을 도울 줄 몰랐던 김씨 성의 총각도 있었다. 김씨 총각은 비명횡사했는데, 연이의 선행 때문에 되살아났다. 연이는 서른여덟이 되던 해 죽었는데, 그날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연이의 혼이 이 돌부처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이 부처를 미륵불로 여기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경북 안동 봉정사 부속 암자 영산암에선 꽃과 나무, 석등으로 꾸며 놓은 마당과 단정하고 소박한 한옥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
들리는 것은 풀벌레와 바람소리가 전부다. 아침이면 물안개 피는 호수가 바로 앞이어서 신비로움을 더한다. 안동 시내에서도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들어가야 한다. 산속에 뭐가 있을까 싶은 이곳에 고택이 들어서 있다. 산자락에 있는 고택만으로도 놀랍지만, 안에 들어가 마주하는 풍경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문밖에 펼쳐진 산세와 호수 풍광이 세상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고택은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될 처지에 놓인 임동면 지례리 의성 김씨 지촌파의 종택과 서당, 제청 등 건물 10채를 마을 뒷산자락으로 옮긴 것이다. 지촌 김방걸 선생의 종손 김원길씨가 고택을 옮긴 후 한국 최초의 예술창작마을 ‘지례예술촌’을 열었다. 예술인들의 창작 및 연수공간 등으로 활용됐는데, 최근엔 가족이나 외국인 대상으로 문화 체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체험의 즐거움보다는 이곳의 분위기에 취하는 이들이 더 많을 듯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앞에 호수가 펼쳐지는 풍광은 어느 곳에서도 접하기 힘든 경험이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이불을 폭 뒤집어쓴 채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게 만든다.
이런 고요함을 찾는 이라면 안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봉정사다.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이 있는 곳이다. 1200년대 초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극락전을 비롯해 다른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툇마루가 있는 대웅전 등을 둘러본 뒤에는 부속 암자 영산암으로 발길을 옮겨야 한다.
문 밖에 펼쳐진 산세와 호수 풍광이 세상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안동 지례예술촌. 고택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에 푹 빠지면 지구에 자기 자신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버스로기획 등을 통하면 기존 안동 여행지 외에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관광 프로그램 등 안동의 새로운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
안동=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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