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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넷 쫓아낸 세종·밤엔 호색한 성종

입력 : 2018-09-15 03:00:00 수정 : 2018-09-14 19:3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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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아닌 인품·사생활에 초점 / 몰랐던 조선 왕들의 민낯 엿봐 / 세종은 가혹한 시아버지였고 / 성종은 기생 궁궐에 끌어들여 / 영조는 자식들 대놓고 차별해
박영규 지음/옥당북스/1만7500원
조선 왕 시크릿 파일/박영규 지음/옥당북스/1만7500원

“공부는 안 하고 건달들하고 어울려서 뭐 하는 겁니까?” “야, 누가 너하고 놀자고 그랬냐? 왜 따라다니면서 간섭이야!” “옷은 그게 뭐예요? 외모에 신경 쓸 시간에 마음부터 닦아야죠.” “아는 거 많은 너나 도 많이 닦아라. 나는 노는 거로 쭉 나가련다.” “노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남의 여자는 왜 자꾸 건드려요?”

“네가 또 아버지께 일렀지? 하여튼 자식, 틈만 나면 고자질이야.”

범생이 동생과 건달 형의 대화다. 600여년 전 당시 열일곱살 충녕대군(세종)과 스무살 양녕대군이다. 세자 신분인 양녕은 ‘국민 난봉꾼’이었고, 충녕은 ‘국민 범생이’였다. 양녕은 서울의 이쁘다는 여자는 유부녀라도 죄다 쫓아다니며 왕실 체면을 구겼다. 충녕은 집안 노비들을 총동원해 양녕을 감시하고 다녔다. 양녕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면 어김없이 태종에게 일러바쳤다. 그 범생이 동생은 난봉꾼 형을 밀어내고 왕위를 계승해 성군이 되었다. 세종이 성군으로 기록된 것은 한글 창제와 과학 혁명 등 위대한 업적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일 잘한다고 해서 인품이 훌륭하진 않듯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이라고 해도 반드시 훌륭한 인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저자는 책에서 “조선 군왕들의 당대 생각과 행동을 지금 시대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업적과 인품은 분명히 달랐다”고 평한다. 사진은 왕들의 어진이다. 왼쪽부터 세종, 성종, 영조, 정조.

이 책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왕들의 품성을 망라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조선 국왕들을 골라 그 뒷얘기를 간추린 이야기 책이다.

성군의 대표주자 세종은 웬만한 잘못을 저질러도 신하들을 죽이지 않았고, 큰 부정이 아니면 심하게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독 며느리들을 몰아세운 왕으로 실록에 나와 있다. 세종은 소헌왕후에게서 여덟 아들을 얻었는데, 결혼시킨 뒤 며느리 넷을 쫓아냈다. 그 첫번째 며느리는 세자 향(문종)의 아내 휘빈 김씨였다. 그녀는 입궁 2년 만인 1429년 사가로 내쫓겼다. 이유는 주술이었다. 휘빈 김씨가 남편인 세자 향의 사랑을 얻기 위해 주술을 사용했다가 발각됐다는 것. 이어 맞아들인 순빈 봉씨 역시 1436년 폐출됐다. 순빈은 7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했다. 임신하고 낙태했다는 거짓말이 들통났다. 궁궐 여종과 동성애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나돌아 내쫓기고 말았다. 저자는 휘빈과 순빈의 폐출에 대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두 여인이 남편의 사랑에 목말라 다소 황당한 행동을 했다”고 보았다. 저자는 “세자 향의 잘못이 더 크지만 세종은 며느리들을 미워한 비정한 시아버지”라면서, “아들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남의 자식에게는 가혹했다”고 평했다. 세종이 몰아낸 며느리는 또 있었다.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와 영응대군 아내 송씨였다. 남씨는 좀 모자란다는 이유로, 송씨는 병약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의 두번째 성군을 든다면 성종이다. 성종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났다. 그런데 낮과 밤이 달랐다. 신하들은 성종을 일러 ‘주요순(晝堯舜) 야걸주(夜桀紂)’라 비아냥댔다. 낮에는 요순과 같은 성군이요 밤에는 호색한이었다. 성종이 얼마나 색욕에 강한 사람이었는지 실록에 나온다. 연산군 같은 폭군을 제외하고는 기생을 궁궐로 끌어들인 왕은 없었지만, 성종 역시 연산군에 못지않았다.

영조는 좋아하는 자식, 싫어하는 자식을 대놓고 차별했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군왕이었지만 자식들에겐 ‘차별군주’였다. 영조에 못지않은 성군으로 기록된 개혁 군주 정조는 뒷거래를 잘하는 왕으로 기록되었다. 당시 기득권층 노론 세력과 힘겨루기했던 정조는 노론 신하들의 뒷조사로 원한을 샀다. 정조가 뜻을 펴지못하고 일찍 하세하면서, 조선은 구한말 열강들에 짓밟히는 단초가 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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